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 100회의 역사

입력 2022-05-0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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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권장은 먼저 여자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러나 여자 쪽에는 별로 생각이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방 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 운동이 극히 부족한 조선 여자의 체질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매우 허약하므로 여자의 운동을 권장함이 긴박함을 통절히 깨달은 본사(동아일보)는 이에 대한 사업을 개척하여 여자의 운동 권장을 시작하고자 우선 관 사립 여학교의 정구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했다.’<동아일보 1923년 6월 14일자>

올해로 100회를 맞은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정구)대회’는 단일종목으로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여성만이 참가한 최초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1회 대회는 어려움도 많았다. 여성스포츠대회 창설은 당시의 관념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남녀 7세 부동석’의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고, 여성의 외출을 금기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년 대회(조선여자정구대회)는 경기 제일고녀(경기여고 전신)의 정동코트에서 열렸다. 당시 여고선수들은 치렁치렁 땋아 내린 머리에 띠를 동여매고, 무명 치마에 흰 양말을 신은 고전적 모습이었다. 경기장에는 학부모와 임원 외의 남자는 출입할 수 없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른들은 딸의 경기를 응원하기보다는 감시하는 데 급급한 형편이었다. 관중 출입을 부녀자만으로 제한하자, 일부 짓궂은 청년들은 경기장 담벼락 밖의 높은 나무에 올라 앉아 경기를 훔쳐보기도 했다.

원년 대회에는 2만 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4000여명 수용에 불과한 제일고녀 운동장만으로는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 부근 불교중앙포교당과 보성초등학교의 양해를 얻어 주변 언덕으로 관중을 안내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5년 제13회 대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여자정구대회는 해마다 번창했다. 그러나 1936년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이 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됨에 따라 이 대회도 중단됐다. 1937년 동아일보가 복간된 이후 1938년(16회)과 1939년(17회) 가까스로 대회를 치렀으나,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면서 또다시 중단의 비운을 맞아야만 했다.

8·15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1947년 다시 열린 이 대회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발전적 혁신을 도모했으나, 1950년 6·25전쟁과 함께 또다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 대회는 1954년 동아마라톤대회 등과 함께 부활돼 중등부, 고등1-2부, 대학부, 일반부로 규모를 확대했다. 1965년 제43회 대회부터는 경식부를 신설해 제1회 전국여자테니스대회를 함께 열었고, 1966년에는 아예 테니스대회를 별도로 개최하면서 제44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3년 제51회 대회부터는 국제대회의 면모를 갖추면서 일본과 대만 선수들이 참가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대회는 정구국가대표선수의 산실로서 우리나라 정구를 세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1966년 테니스와 분리되기 전까지 많은 테니스 스타들이 이 대회를 통해 성장했다.

2001년 한국정구의 요람이었던 서울 효창구장이 서울시의 계획에 의해 헐리면서 경기도 안성으로 장소를 옮겼던 이 대회는 80회 대회(2002년)가 아시안게임 리허설로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렸으나 81회 대회(2003년)부터 84회 대회(2006년)까지는 안성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2007년 85회 대회부터 경북 문경에서 열리고 있다. 또 2006년 84회 대회부터는 대회 명칭을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로 바꾸고 남자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99년 전 8개교로 출범한 이 대회는 이제 국내에서 단일종목으로는 가장 오래된 권위 있는 스포츠 이벤트가 됐고, 단순한 스포츠 행사의 차원을 넘어 전통을 숭상하고 귀중한 문화유산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대회로 자리매김 했다.

권재민 기자 jmart220@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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