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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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홍빛 핏방울 대신에 웃음이 사방으로 튄다. 해고 당한 가장의 끔찍한 연쇄살인 계획을 다루면서도 냉혹한 현실을 비틀어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다. 박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웃긴’ 작품으로 자리하게 된 이번 영화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지난 17일 마침내 한국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O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주다

‘어쩔수가없다’는 장기 근속 끝에 해고 통보를 받은 제지회사 직원 만수의 재취업 과정을 그린다. 다만 그의 재취업 과정은 다른 구직자들과 사뭇 다르다. ‘제지업 복귀’만을 원하는 그는 재취업 성공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스펙의 구직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앞서 ‘어쩔수가없다’와 같은 소설(액스)을 원작으로 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2005년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제거하는 잔혹함에 초점을 맞춰 차가운 스릴러로 이야기를 펼쳤다. 반면 ‘어쩔수가없다’는 평범한 인물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선택하는 극단적 행동과 내적 갈등을 극강의 블랙코미디로 풀어낸다.

특히 살인이라는 끔찍한 행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1980년대 재치 있는 가요가 흘러나올 때마다, 만수의 행동은 더욱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관객을 조소하게 만든다. 조용필의 ‘고추 잠자리’, 김창완의 ‘그래 걷자’, 배따라기의 ‘불 좀 켜주세요’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극 중 살인의 주체가 대단한 킬러나 전문 살인자가 아닌 ‘평범한 이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박 감독의 의도다. 박 감독은 “관객들이 인물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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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영화계의 위기를 은유하다

주인공 만수가 해고된 이유이기도 한 제지산업의 쇠락은, 현재 한국 영화계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는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던 제지회사가 구조조정과 기술 변화의 파도에 밀려 무너져가듯, 한국 영화계 또한 OTT의 급성장, 극장 관객 감소, 제작비 폭등 등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수가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는 절박함은,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영화인들의 초상처럼도 읽힌다. 특히 영화가 묘사하는 ‘재취업 전쟁’은 오늘날 한국 영화계가 직면한 프로젝트 쟁탈전과 제작비 확보 경쟁을 연상케 하며, 블랙코미디적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긴다.

이와 맞물려 박 감독은 “보통 사람들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지만, 만수에게는 ‘인생 그 자체’였다. 영화 역시 별개 아닐 지라도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영화에 쏟아 붓는다”라면서 “팬데믹 이후 영화 업계가 많이 어렵지만 특힌 한국 영화계 회복 속도는 더욱 더디다. 우리 영화가 그 늪을 빠져나오는 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이승미 기자 s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