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1인4역이정은“연기할수있다면배역안가려요”

입력 2008-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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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역등맛깔스런연기…“정직한모습보여드릴게요”
새파랗고 흰 티셔츠들이 어두운 장독대를 밝힌다. 옥양목처럼 흰 천들도 줄줄이 빨랫줄에 걸려있고, 세탁한 옷이 바람에 날려 옆집으로 날아가기도 한다. 여자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속옷을 슬쩍 내려 움켜쥐고, 슬그머니 옆집 남자 눈치를 본다. 남자는 마르지 않은 축축한 남방을 걸치며, 여자가 볼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골목 초입에는 빨간색, 초록색으로 투박하게 칠을 한 구멍가게가 버티고 섰고,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맥주를 마신다. “방 빼!”, “집세 내!” 기차 화통 삶아먹은 소리가 지하셋방에서 울리고, 오지랖 넓은 주민들은 옆집 사정에 훤하다. 쉬쉬하고 피하지만 금세 들켜버리고, 혼자 울다가 같이 웃고 슬픔을 떨치는 동네. 뮤지컬 ‘빨래’가 보여주는 서울 풍경이다. 대학로 연극 무대 안에 ‘서울 살이 몇 핸가요?’ 외치는 배우들이 등장했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불법체류 건으로 노심초사하고, 서점에서는 유명 작가가 팬 사인회를 하는 등 작품의 시점은 현재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향수에 젖게 만들고, 도시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게 ‘빨래’ 매력이다. 60,70년대를 산 사람들은 상경해 고생한 추억을 반추하고, 이천년 대를 사는 사람들은 취업으로 허덕이는 구직 현실을 떠올린다. 빨래는 2005년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극본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06년 공연 이후 2년 만에 다시 하는 공연이다. 이번에는 새로운 노래 9곡과 연주곡 5곡을 추가했다. 펑키와 랩, 포크송 등 장르도 다채롭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라고 희망을 노래하는 ‘빨래’와 ‘비오는 날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회사 가기 싫어’하며 투정부리는 ‘비오는 날이면’ 등 흥겹고 애잔한 가사의 노래가 총 16곡이다. 주인공은 몽골과 서울 노동자다. 솔롱고는 서울만 오면 돈을 잘 벌 줄 알았지만 월급도 못 받고 설상가상 길에서 두들겨 맞는다. 나영은 직장에서 사장의 비위에 거슬리는 소리를 한 탓에 강제해고 통지를 받는다. 그래도 위로해주는 이웃이 있고, 삶의 잔재미를 찾아가며 용기를 얻는다. “영원히 빨래가 되어 평생을 당신에게 세탁되어지고 싶소.” 이외수 소설가가 직접 부인에게 건넸다는 프러포즈마냥, 나영과 솔롱고는 빨래로 사랑의 인연을 맺는다. 빨래를 널다 마주쳐 은근한 호감을 나누고 결국 빨랫감을 거드는 한 집살이를 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희정 엄마는 빨래 거품을 밟으며 구씨 아저씨가 떠난 외로움을 삭이고 하하하 웃는다. 특히 주인 할매는 몇 해째 방 안에 있는 장애인 딸의 기저귀 천을 꾹꾹 밟으며 활력을 얻는다. 비누 방울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빨래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 객석에서 눈물을 닦는 관객도 있다. 공연장의 단골 고객 여성층이 부모와 함께 보기에 좋다. 1994년 채시라, 한석규, 최민식 주연 MBC ‘서울의 달’ 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능청스러운 야심가 청년과 소박한 시골 청년, 춤바람 난 퇴물 제비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해 달동네 서울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렸다. 지금 대학로에 가면 또 다른 특별한 ‘서울의 달’이 떴다. 빨래는 화려하게 치장한 것 없이 신파와 흥겨움을 섞어 옥탑방과 지하셋방 서울살이를 보여준다. 변인숙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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