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장끼리의 만남인가?”
권오민의 말에 백홍석이 멋쩍게 웃었다.
B조 본선리그의 플래카드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 각자 1패씩을 안고 있다. 백홍석은 유창혁에게, 권오민은 이창호에게 졌다. 오늘 지는 자는, 남은 한 판과 관계없이 짐을 싸야 할 것이다.
- 드르륵!
반상에 돌이 쏟아지고 연장자인 권오민이 돌을 쥐었다. 결과는 권오민의 흑번이다.
두 사람은 명문 권갑용 도장의 선후배 사이가 된다. 6살 차이가 나니 권오민이 까마득한 ‘형님’이시다.
권오민은 연구생 시절부터 ‘사활의 귀신’으로 통했다. 다른 건 뭐 그냥 그런데(미안!) 사활에 관한 한 동료·선후배를 통틀어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기출문제’를 잘 풀어내기도 하지만 창작에도 귀신이었다.
그가 만든 기상천외한 사활문제들은 지도사범에 의해 교재로 둔갑해 시도 때도 없이 동료와 후배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백홍석도 어릴 적 권오민이 만든 사활로 인해 스트레스 깨나 받았을 것이다.
흑이 <실전> 5로 붙였을 때 백은 <해설1> 1로 젖혀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배석이다. 흑14로 백 두 점을 ‘꿀꺽’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상귀 흑 때문에 축이 안 되는 것이다.
<해설1>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백11로 단수치는 대신 <해설2> 백1로 젖히면?
흑은 ‘고맙습니다’ 하고는 흑2로 꾹 잇는다. 백3에는 물론 흑4이다. 이렇게 되면 이 흑은 살아있다. 그런데 백은 A의 약점이 영 눈에 밟힌다. 게다가 위쪽 백도 얼른 살아야 한다. 백이 바쁜 바둑이 된다. 삶도, 바둑도 ‘먹고 살기에’ 바쁜 인생은 괴롭다.
권오민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바둑판 위를 쓸어본다.
‘얼른 사활 하나 나와라’ 하는 것만 같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7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