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뽀얗게빨갛게…즐거운화장놀이

입력 2009-03-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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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는 엄마의 화장품과 뾰족구두를 무척 탐을 냈습니다. 엄마는 무슨 모임이나 친척 결혼식이 있을 때, 뽀얀 분첩과 빨간 립스틱을 바르셨습니다. 그걸 보면 저는 어린 마음이었지만, 화장을 너무 너무 해보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화장하실 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농사로 검었던 얼굴이 뽀얗게 변하고 입술색이 빨갛고 예쁘게 변합니다. 그 모습 보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늘거리는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고 외출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마치 선녀처럼 너무나 예뻤습니다. 어느 날 엄마께서 친척집 결혼식에 가셨다가 늦게 오신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와 동생은 저녁 늦도록 놀면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생각해낸 것이 바로 화장 놀이였습니다. 원래 엄마의 화장품을 호시탐탐 노리며, 빨간 립스틱과 뽀얀 분첩을 발라보곤 했습니다. 그걸 못 하게 하시려고 엄마는 화장품을 저희가 모를만한 어딘가에 숨겨놓곤 하셨습니다. 동생과 전 온 집안을 뒤져 화장품을 찾았는데, 장롱 속 이불을 전부 꺼내 발판으로 삼고 장롱 위를 더듬어봤습니다. 거기에 빨간 립스틱과 분첩이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분가루를 날려가며 얼굴에 뽀얀 칠을 하고, 눈썹도 숯검댕이처럼 새카맣게 그려 쥐 잡아 먹은 듯 입술도 빨갛게 그렸습니다. 그래 놓고 서로 바라보며 “네 얼굴이 엄청 웃겨부려야∼ 내 얼굴도 그래 이상허야. 흐미. 완전 딴 사람됐네∼” 이러면서 깔깔깔 웃으며 서로 손거울을 뺏어 들여다보며 좋아했습니다. 내친김에 엄마가 아끼며 바르시던 매니큐어도 꺼내 발랐습니다. 매니큐어를 저와 동생은 열 손가락에도 바르고 열 발가락에도 다 바르고, 입으로 호호 불며 빨리 마르라고 팔과 다리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말렸습니다. 그래놓고 보니까 그야말로 아가씨가 된 듯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문제는 엄마가 오시기 전에 그 화장을 지우고 잤어야했는데, 서로 놀다가 그만 그대로 잠이 들고 만 겁니다. 엄마는 밤늦게 들어오셨다가 두 딸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셔서 “아니 이것들이 시방 뭘 한 것이여∼ 아 퍼뜩 일어나 세수 안 허냐∼ 시상에! 장롱 위에 올려놓은 건 또 어뜩케 알고 꺼냈디야∼ 아이구 징혀∼” 이러시면서 저희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치셨습니다. 저희가 세수하고 들어오자 소리소리 지르시며 “이건 왜 쳐 발라서 멀쩡한 립스틱을 다 분질러 놓은겨! 에구머니나! 이 귀한 분을 다 찍어 발렀네. 으미 시상으… 이걸 다 어쩔 것이여! 이런 건 지금 안 혀도 크면 다 헐 것인데…뭐가 그리 급해서 이 지경을 만드는 겨? 아이고 아이고! 지난번엔 구두도 꺼내 신어 굽을 죄∼ 망가뜨려 놓더니… 세상에! 내가 아주 네들 때문에 못산다, 못살아!!” 하시며 가슴을 탁탁 치셨습니다. 제가 그 전에 엄마의 뾰족 구두 신고 굽 망가뜨린 일이 생각나 고개를 더 푹 숙였습니다. 요즘은 계속 그렇게 엄마 몰래 화장품, 구두 쓰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멋 부리고 예쁘게 꾸미는 거 좋아하시던 저희 엄마께서 벌써 연세가 많아지셔서 빨간 립스틱 사다 드리면 너무 진하다고 안 바르시고, 대신 연한 분홍색을 꺼내 바르셨습니다. 굽 높은 뾰족구두는 엄두도 못 내시고, 무릎 관절이 안 좋아 편한 신발만 찾으시는 우리 엄마! 비록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사셨지만 가끔 친척들 결혼식이나 초등학교 운동회 날 곱게 화장하고 오시면, 주변에서 미인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그런 엄마가 너무 예뻐서 “엄마! 만날 화장하고 댕기믄 안 되것나∼ 디기 이쁘다∼” 하면 “나가 만날 화장허고 앉아 있으믄, 농사는 누가 짓고, 느들 핵교는 누가 보내것냐∼” 하시며 곱게 눈을 흘기셨던 엄마였습니다. 백화점 가서 보니까, 봄이라고 예쁜 립스틱들 참 많이 나왔던데… 다음 번 친정 나들이 때는 하나 사드려야겠습니다. 우리 엄니 곱게 화장시켜줄 예쁜 루즈로 사가겠습니다. 서울 종로 | 이미란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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