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두면빨리바둑이늘까? NO!

입력 2009-07-10 1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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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의 속기는 속기(速記)가 아닌 속기(速棋)를 뜻한다.

바둑을 빨리 둔다는 얘기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속기파와 장고파로 나뉜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속사포가 있는가 하면, 생각에 생각을 쌓아 한 수를 택하는 지긋한 쪽도 있다.

자고로 애기가들의 단 하나의 희망은 바둑이 느는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아마추어들에게 ‘바둑이 느는 법’을 문의 받는다. 물론 대답은 신통할 게 없다.

프로들도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 무엇을 배우는 데에 왕도는 없다. 오로지 진실이 있다면 이게 진실이다.

바둑이 늘고 싶다. 그렇다면 바둑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속기가 좋을까, 아니면 장고가 좋을까.

지난 5월에 타계한 일본의 기성(조훈현 9단의 실전스승으로 더욱 유명하지만)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세상이 알아주는 속기파이자 속기 예찬론자였다. 그는 제자가 바둑판 앞에서 장고하고 있는 ‘꼴’을 못 봤다. 후지사와 9단이 조훈현을 예뻐했던 것도 조9단이 시원시원하게 바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접이식 바둑판을 가지고 어린 조훈현과 하루에도 몇 판이고 속기바둑을 두었다.

후지사와 9단은 “빨리 두어야 감각이 는다”고 주장했다.

바둑은 인생과 같아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큰 자리냐, 급한 자리냐, 돌을 살릴 것이냐 죽이고 활용할 것이냐, 잡으러 갈 것이냐 이쯤에서 살려주고 마무리할 것이냐. 고수일수록 판단이 정확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키우기 위해선 속기가 최고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후지사와 9단은 현역 시절 ‘최고의 감각’이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감각이 필요한 포석에 강해 스스로 “초반 30수는 내가 세계 제일”이라 자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도 만만치 않다. 특히 요즘처럼 속기기전이 우후죽순 늘어가는 상황에서는 프로들조차 속기에 대해 회의적인 이들이 많다.

“속기만 두다 보면 ‘수읽기’가 아닌 ‘배짱’만 커진다. 수를 정확히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 죽을 것 같으면 손 빼고, 수가 날 것 같으면 무조건 끊고 본다.”

한 젊은 프로기사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경우는 어떨까?

전문가 의견은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이다. 지나친 속기는 바둑의 기본인 수읽기 향상에 도움이 안 된다. 지나친 장고도 마찬가지.

고수들은 ‘하수의 장고는 숨쉬기 운동’이라 말할 정도다. 오죽하면 바둑격언에 ‘장고 끝에 악수난다’라고 했을까.

바둑은 생각하는 게임이다. 아마추어들이 생각을 즐겨가며 바둑 한 판을 두는 데는 40분~1시간 정도가 적당하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속기는 그저 팔운동에 불과하다.

장마전선이 음침하게 북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바둑 두기엔 최적의 시즌이 왔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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