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 홍길동의 후예

입력 2009-12-05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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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슈퍼히어로

맞다. 홍길동은 조선시대의 슈퍼히어로였다.

인간들 속에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모든 슈퍼히어로는 태생적인 고뇌를 가지고 있다. 서글픈 서자 출신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벼슬길에도 나갈 수 없었던 홍길동이 의적이 되어 탐관오리들과 맞서 싸우고 훔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줘 모든 백성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야기는 '베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미국식 초인적 영웅들의 무용담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결국 조선왕조의 계급구조를 뒤엎지는 못했지만 '율도국'이라는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는 것도 허균의 소설 홍길동의 스케일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이런 홍길동의 19대 자손임을 자처하고 나선 '홍길동의 후예'는 최초의 한국판 '슈퍼히어로'를 표방한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스케일이 작고 어설프게 코믹한 도둑 가족 이야기에 머물고 말았다.

한국판 슈퍼히어로인 홍길동의 후예 홍무혁 역을 맡은 배우 이범수. 근육질 몸매에 평범한 키와 외모는 슈퍼 히어로 캐릭터에 어울린다.




▶홍길동 가문의 대계를 잇다

홍길동의 19대손인 홍무혁(이범수 분)은 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하는 멋쟁이 음악교사이지만, 가문의 전통을 이어 악독한 부자들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홍씨 가족의 장남이다. 그 아버지(박인환)는 대학교수, 어머니(김자옥)도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지만 밤에는 전문 금고털이범으로 변신해 현대판 의적으로 활동한다.

같은 학교 학생인 홍무혁의 남동생(장기범)은 어리지만 가문의 '대계'를 이어가는 일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역시 같은 학교 선생님으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연화(이시영)는 홍무혁과 3년이나 연애를 했지만 결혼을 못해서 안달이다.

홍씨 가족은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짓밟아 성공하고 불법자금으로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악독한 사업가인 이정민(김수로)의 금고 속에 있는 불법 비자금을 정교한 수법으로 터는데 성공한다.

한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 재필(성동일)은 사업가 이정민을 찾아가 그를 잡아 넣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데,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유독 이정민의 재산만을 털었다는 도둑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와중에, 홍무혁은 연화의 성화에 못 이겨 청혼하러 연화집에 갔다가 그녀의 오빠가 바로 검사 재필임을 알고 놀란다.

결국 홍씨 집안은 이정민과 검사 재필을 함께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처하는데, 연화가 범인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정민은 부하들을 시켜 학교 앞에서 그녀를 자동차로 납치한다.


▶슈퍼히어로 피규어를 모으는 악당

이 영화에서 독특한 캐릭터는 이정민이다.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을 짓밟고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괴롭히고 정부 권력에 수많은 뇌물을 뿌리는 악역이지만 태권브이 건담 슈퍼맨 같은 (엄청나게 비싸긴 하지만) 피규어를 사 모으는 것이 취미다. 나름 귀여운 악역인 셈이다.

결국 이 피규어들은 이 영화의 핵심인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패러디하는 의미가 있다. 김수로가 독특한 캐릭터를 살려 검사를 협박하면서 베트맨이나 슈퍼맨 포스터의 포즈를 흉내내는 장면은 이런 면에서 꽤나 재밌고 인상적이다.

주인공 캐스팅도 좋았다. 이범수야말로 슈퍼히어로를 맡기에 적합한 연기자이다. 근육질 몸매에 다소 단신이라는 점도 오히려 슈퍼히어로 캐릭터로는 알맞을 것 같다. 베트맨 시리즈의 마이클 키튼이나 스파이더맨의 토비 맥과이어도 큰 키가 아니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의 정의를, 한편으로는 로또 대박을 꿈꾸는 검사의 캐릭터는 여러 가지 재미를 안겨줬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인 홍길동을 잡을 지 말 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흡인력이 많이 떨어지는 점은 아쉬웠다.

홍무혁의 애인 연화(이시영)가 무혁의 입술을 물어뜯는 '키스신'은 두번이나 반복돼 식상함을 주었다.




▶정말 웃기려면 오히려 심각해야

무엇이 관객을 웃게 하는가?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웃기려고 과장되게 오버하는 연기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그 상황에서 무지 심각하지만 보는 사람은 웃지 않을 수 없는 연기가 진짜 웃기는 연기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시영의 연기는 아쉬웠다. 홍무혁과의 결혼이 계속 늦어져 분노와 슬픔에 젖어 사는 연기도 노골적으로 코믹하려고 애를 쓰니 역효과가 났다. 홍무혁이 연화의 소개로 처음 검사를 만나는 대목, 연화가 납치될 때 그녀의 몸부림에 악당들이 코믹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검사가 홍무혁에게 전화를 할 때 형사(조희봉)가 옆에서 계속 익살스런 맞장구를 치는 모습도 너무 오버스럽다.

또 기발한 것도 한 두 번이다. 두세 번 반복되면 짜증이 난다. 매체에 이미 소개된 이범수의 입술을 물어뜯는 이시영의 '키스씬'도 두 번이나 반복되고, 전화 받을 때마다 검사의 '로또 대박' 벨소리가 울린다. 형사가 '홍삼즙'을 빠는 장면도 여러 번 나온다. 그나마 이범수의 '헬륨 목소리'는 반복되어도 꽤 재밌는 편이다.

그리고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웃음이야 말로 진짜 웃음인데 연화가 홍무혁이 게이라는 얘기를 동생에게 듣고 오해해서 일어나는 해프닝들은 너무 진부하다.

하물며 동생이 금고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와 곤경에 처한 홍무혁을 구해주는 장면도, 이것을 암시하는 동생의 말과 '북한땅굴' 책을 보는 장면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어떻게 관객들이 뻔한 결말을 예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배우 이범수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 수트로 슈퍼 히어로의 분위기를 냈지만 빈약한 액션 연기로 도둑 가족의 모범적인 장남 역할에 그친 느낌을 준다.




▶슈퍼 히어로에 걸맞지 않은 빈약한 액션

사실 금고 전문털이범 이야기는 워낙 많이 나온 소재라서 이것을 신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독특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교묘하게 상대 지문을 체취해 가짜 지문을 만들어 금고를 연다든가, 빌딩의 화재를 가장해서 혼란한 틈을 이용한다든가, 내려오는 방호벽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든가 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슈트와 고글, 헤드셋을 끼고 줄을 타고 레펠을 해서 내려오는 걸 화려한 액션이라고 내놓으면 안 된다. 이런 액션 와중에 뭔가 독특하고 신선한 구성과 아이디어가 반짝여야 한다. 더욱이 이런 도둑 씬에서 시간에 쫓기고 들킬지 모르는 급박감과 긴장감은 필수적인데 그것도 부족하다.

홍무혁이 애인을 납치한 범인들의 자동차를 쫓아가는 장면은 건물사이를 뛰어넘는 '야마카시' 스타일을 표방한 것 같은데 별로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흔한 형사들의 추적 장면에 가깝다. 여기에다 동생이 MTB를 타고 추적하는 모양도 몇 번의 드리프팅 동작이 나올 뿐 장애물을 뛰어 넘는 점프나 다양한 묘기가 부족하다.

홍무혁이 차량을 멈춘 후 악당들과 싸우는 장면, 금고 앞에서의 마지막 결투씬도 평범한 결투씬에 그친다. 슈퍼히어로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결국 그는 '신출귀몰했던' 조상님의 후손에 걸맞지 않게 너무 빈약한 능력을 가진 도둑 가족의 '모범적인' 장남 역할에 그친 느낌이다.


▶진짜 한국판 슈퍼히어로는 언제?

최근 한국 영화계는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고 있다.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액션은 기본이고 환타지 스릴러 '괴물'이나 'D-war' 같은 괴수영화, '해운대'같은 재난영화들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완전한 초인적 캐릭터가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슈퍼히어로는 말 그대로 초인을 창조함으로써 나약한 우리 자신을 뛰어 넘는 궁극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따라서 한번 탄생한 슈퍼 히어로 캐릭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만화 TV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진 슈퍼맨 베트맨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영화를 만들려면 그야말로 관객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특하면서도 압도적인 스케일과 캐릭터가 필수적이다.

홍길동의 '진짜' 후예가 될 한국판 슈퍼히어로 영화의 등장을 기대한다.

하정규 한국 EFT코칭센터 소장 ckha9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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