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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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감독’ 봉준호의 완벽한 귀환이다.

워너브라더스라는 할리우드 초대형 영화사와의 협업에도 봉준호 감독 특유의 유머와 확고한 주제 의식이 도장처럼 콱 박혀 있다. SF의 탈을 쓴 풍자극, SF 블록버스터가 아닌 독창적 SF 블랙코미디. 당신이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완전히 새로운 SF영화 ‘미키 17’이다.

‘미키 17’은 지구에서 큰 빚을 진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유력 정치인인 마셜(마크 러팔로)이 이끄는 얼음 행성 개척단 우주선에 올라타 익스펜더블로 근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익스펜더블은 목숨을 잃어도 신체를 프린트해 살아나는 일종의 소모품이다.

이런 새로운 행성 개척 등의 설정은 언뜻 기존에 봐왔던 여러 SF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재프린팅’되는 익스펜더블(소모품)이라는 설정 또한 복제인간의 노동을 다뤘던 덩컨 존스 감독의 2009년 영화 ‘더 문’이나 레플리카(복제인간)의 딜레마를 긴밀하게 다뤘던 SF의 고전 ‘블레이드 러너’ 등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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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뿐이다. 복제 인간, 행성 개척 등의 설정을 친절히 설명하는 초반부를 지나, 17번째 미키가 자신이 죽지 않았음에도 프린팅 돼 버린 18번째 미키를 마주치는 순간부터 영화는 SF라는 거대한 장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독창적인 봉 감독만의 이야기를 펼친다. 할리우드 SF 영화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광활한 우주와 스펙터클한 스케일 등에도 무심할 정도다. 영화는 마침내 봉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봉 감독이 데뷔 때부터 늘 다뤘던 바로 그 이야기. ‘인간과 계급’을 날카롭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계급 문제는 주요 주인공들의 위치와 직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극단적 블루칼라 노동자인 미키와, 미키를 고용하고 부리는 얼음 행성 개척단의 리더이자 독재 정치인 마셜의 대비는 ‘기생충’ 속 부자 가족과 가난한 가족, 혹은 ‘설국열차’ 속 꼬리 칸과 머리 칸 등과 맞닿아 있다. 특히 잘살아 보려 마카롱 가게를 개업했다가 망해 큰 빚은 지게 됐다는 미키의 설정은 ‘기생충’에서 대왕 카스텔라 가게를 개점했다가 망한 기택(송강호) 가족의 연장선처럼도 보인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봉 감독은 계급과 자본주의를 넘어 민족주의 및 식민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까지 담아 전작보다 한층 더 넓은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낸다. 개척단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유독가스, 폭력적 상황 등에 내몰려 ‘실험실의 쥐’처럼 희생되는 미키의 모습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민을 상대로 행했던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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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최고의 유전자’를 뽑아 새로운 행성에 완벽한 인류를 퍼뜨리자고 말하는 마셜의 모습에서는 과거 게르만 민족만이 고결하다 믿고 ‘레벤스라움’이라는 게르만 혈통 아기 공장을 운영했던 히틀러의 모습이 읽히며, 원래 얼음 행성에 거주하던 외계 생명체에게 자기들 마음대로 ‘크리퍼’(기괴하다는 뜻)라는 이름을 붙인 뒤, 그들을 미개하다고 규정짓고 행성에서 몰아내려는 권력자의 행동은 아메리카 지역의 인디언을 밟고 일어선 미국을 비롯한 과거 여러 제국주의 국가를 대변하는 듯 보여 의미심장하다.

‘미키 17’은 이처럼 인간과 역사의 여러 어두운 면을 다루지만,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봉 감독의 특장점이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인공 등이 매끈하게 사건을 해결해야 결정적 타이밍에 삐그덕 중심을 잃는, 하나의 장르가 된, 이른바 봉준호식의 ‘삑사리의 미학’도 역시 빛난다.


이승미 기자 s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