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동아 | 양형모 기자] 소리 없이 중심으로 이동하는 배우는 종종 느리게 눈에 들어오곤 한다.

tvN 토일드라마 ‘프로보노’ 5·6화는 소주연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든 회차였다. 군수 댁 며느리 카야의 이혼과 체류 문제를 둘러싼 사건은 개인의 사연을 넘어 팀 전체의 판단 기준을 시험하는 고비로 이어졌고, 공익변호사 박기쁨은 그 한복판에서 역할의 무게를 분명히 드러냈다.

감정이 앞서기 쉬운 상황에서도 그는 의뢰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법이 허용하는 선과 현실의 벽을 차분히 짚어 나갔다. 이 회차들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누가 중심을 잡고 판단을 이끌었는지가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팀의 판단이 흔들릴 수 있는 순간마다 박기쁨은 논리로 균형을 맞췄고, 해결책보다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 장면만으로도 ‘프로보노’가 어떤 인물을 축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충분히 전해졌다. 소주연은 이 인물을 통해 주연이 드러나는 방식이 반드시 크거나 강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줬다.

지금 소주연이 주목받는 이유는 화려한 변화나 강한 설정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는 늘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정확한 자리에 서 있었다. 웹드라마 ‘하찮아도 괜찮아’에서 조직에 눌린 신입 사원으로 공감을 얻었고, ‘회사 가기 싫어’에서는 직장인의 속마음을 웃음 뒤에 숨겼다.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에서는 응급실이라는 긴박한 공간 안에서 과장 없이 성장하는 의료진의 얼굴을 보여줬다. 어느 작품에서도 그는 앞에 나서 힘을 주기보다, 장면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역할에 가까웠다.


‘프로보노’의 박기쁨은 그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처럼 보인다. 이전 작품들에서 소주연이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쌓아왔다면, 이번에는 판단의 무게를 견디는 얼굴을 보여준다.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과하지 않다. 카야를 마주한 장면에서 그는 설득보다 공감을 먼저 앞세웠고, 빠른 답 대신 충분히 듣는 쪽을 택했다. 이 선택이 반복되면서 인물은 점점 또렷해졌고, 시청자는 그의 판단을 자연스럽게 신뢰하게 된다.

주연이 화면을 장악하는 방법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소주연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도, 극의 무게를 자신에게 옮길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작품에서 분명히 증명했다. 이 지점이 바로 이전의 소주연과 지금의 소주연을 가르는 변화다.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그의 이력이다. 광고로 출발해 웹드라마, 단막극, 미니시리즈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중간에 공백도 있었고, 더 빠르게 주목받을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역할을 쌓아왔다. ‘졸업’에서 보여준 절제된 감정 표현과 ‘프로보노’에서의 안정된 중심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 소주연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이미 준비가 끝난 배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첫 미니시리즈 주연이라는 타이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를 흔들림 없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가 인물의 힘으로 밀고 나가야 할 순간마다 소주연은 화면 안에서 신뢰를 쌓는다. 이렇게 쌓인 신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선택이 궁금해지는 배우, 이름만으로도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만드는 배우로 나아가고 있다.

요즘 드라마 시장은 빠른 반응과 즉각적인 화제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오래 기억되는 배우들은 늘 다른 길로 눈에 들어온다. 소주연은 지금 그 길 위에 있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