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령의 아름다운 섬 고대도의 바다. 작은 배 는 1832년 7월, 조선 땅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가 타고 온 ‘로드 애머스트호’의 모형이다. 사진제공 |지엔씨21
여행의 첫 단추는 언제나 정직한 허기에서부터 채워진다. 오월의 싱그러움이 서해바다의 짙은 해무와 뒤섞이던 아침, 나와 내 기묘한 여정의 동행자 A씨는 충남 보령 대천항 선착장 근처의 한 소박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마주앉았다. 삽시도로 향하는 여객선의 출항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주린 위장을 채워줄 구원투수는 커다란 대접에 넘칠 듯 담겨 나온 바지락 칼국수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은 뽀얀 빛깔로 정취를 더했고, 청정 서해의 거친 조류를 버텨냈을 통통한 바지락들이 대접 바닥에 무수히 깔려 있었다. 가볍게 썰어 넣은 애호박과 송송 썬 대파 사이로 하얀 면발이 고개를 내밀었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먼저 한 모금 넘겼다. 짜지 않으면서 가슴속 깊은 곳까지 단숨에 뚫어버리는 청량한 감칠맛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들어갔다.
내가 눈을 감고 국물의 여운에 취하는 동안 맞은편의 A씨는 바지락과 껍데기를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단정하게 분리하고 있었다. 영국 유학 시절, 차갑고 눅눅한 런던의 자취방에서 북해의 해산물 스톡(Stock)을 연구하던 (상당히 재미없는) 인간 특유의 엄숙하고 빈틈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 청량감의 생화학적 매커니즘은 지극히 명확합니다. 대천항 앞바다에서 자란 바지락은 타우린과 숙신산(Succinic acid) 성분이 풍부해 호화(Gelatinization)된 밀가루 전분의 텁텁함을 완벽하게 상쇄해 주지요. 국장님이 운율을 논하는 사이에 면발의 겉면이 불어 수용성 전분이 국물로 용출되고 있습니다. 식재료 고유의 물리적 텍스트를 온전히 즐기려면 문학적 사색보다는 저작 운동에 집중하시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아니, 이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굳이 호화 상태와 용출 매커니즘까지 따지셔야겠습니까? 정말 지독하십니다.”
티격태격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칼국수 대접은 바닥을 드러냈고, 타이밍 좋게 우리를 삽시도로 데려다 줄 여객선이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든든하게 채운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섬들이 감춰둔 이야기를 찾아 기분 좋게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대천항-삽시도-고대도-장고도를 오가는 페리선. 사진제공 |지엔씨21
대천항을 떠난 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활 모양을 닮은 섬, 삽시도를 향해 나아갔다.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우리를 먼저 맞이한 것은 은은한 갯내음과 함께 콘크리트 방파제에 적힌 위트 있는 문구였다. ‘삽시도는 처음이지?’. 그 옆으로 고즈넉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솟대 조형물의 실루엣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이국적 정취를 자아냈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도 잠시, 우리는 서해바다의 거칠고 역동적인 삶의 현장으로 직행했다. 어촌마을 주민들의 삶을 온전히 느껴보기 위해 신청한 ‘그물체험’ 배에 올라탄 것이다.

삽시도 그물체험 사진제공 |지엔씨21
그물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나와 A씨는 동시에 짧은 탄성을 질렀다. 사방으로 튀는 차가운 물보라 속에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분홍색 비닐 앞치마를 단단히 동여맨 베테랑 선원의 손길을 따라 펄떡이는 간재미, 광어, 낙지, 꽃게가 그물망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의 야성이 날것 그대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보십시오, A씨! 저 잿빛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생명들의 역동성을! 튄 바닷물이 입술에 닿아 짠맛이 감도는데, 이게 바로 진짜 섬 여행이 주는 살아있는 맛이 아니겠습니까? 저 광어의 힘찬 꼬리짓은 흡사 도시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제 온몸의 세포를 사정없이 때려대는 것 같습니다.”
“생명력의 경탄도 좋습니다만, 과학적으로는 지금 이 타이밍이 어류의 감칠맛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순간입니다. 그물에 걸려 격렬하게 저항한 어류는 체내 ATP(아데노신삼인산)를 급격히 소모하게 되지요. 이는 사후 강직의 도래 시간을 앞당기게 됩니다. 미식학적 관점에서 저 자연산 광어의 이노신산 농도를 극대화해 최고의 횟감으로 승화시키려면, 신속하게 신경을 차단하고 섭씨 4도의 저온 환경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국장님이 세포의 회복을 논하는 동안 횟감의 사후 강직 타이밍이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지요.”
A씨는 굳은 표정으로 그물에서 갓 빠져나온 자연산 간재미와 광어의 표피 선도를 관찰했다. 비록 짠 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연골은 파도의 반동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서해바다가 건네는 날것의 생동감은 우리 오십 대 여행자들의 가슴을 소년처럼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다에서의 격렬한 조우를 마친 후,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은 삽시도 어촌체험휴양마을의 자랑인 ‘워케이션 공유오피스’였다. 유휴 공간을 리모델링해 깔끔하게 구축했다는 28석 규모의 오피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A씨는 약속이나 한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창 너머로 서해의 푸른 파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고, 깔끔한 원목 데스크 위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심 빌딩 안에서 사무실 모니터만 노려보며 살아온 오십 대 여행자의 눈에, 이곳은 일터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농땡이를 부릴 수 있는 최적의 안식처처럼 보였다.
창가 자리에 짐을 풀고 앉아 멍하니 바다 뷰를 감상하려는데, 삽시도 마을의 에너자이저인 임미자 사무장이 환한 미소와 함께 따뜻한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사무장님, 오피스 풍경이 정말 예술입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솔바람과 파도 소리가 꼭 퇴근 시간 알람처럼 들리네요. 이런 곳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현대 직장인들이 꿈꾸는 삶의 종착지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전 철저하게 일과 농땡이를 병행해 볼 생각입니다.”
내 농담에 임미자 사무장이 웃었다.
“아이고, 멋지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우리 오피스가 그냥 뚝딱 만들어진 건 아니랍니다. 주민들의 눈물과 피땀이 서린 비즈니스 전쟁터예요. 삽시도가 경치는 끝내주지만, 섬이라는 특성상 육지보다 오고 가는 경비 부담이 크잖아요. 그래서 처음 2023년이랑 2024년에 워케이션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성적이 영 별로였답니다.”
사무장의 입에서 뜻밖의 생생한 경영 비화가 흘러나오자 귀가 솔깃해졌다. 옆에서 조용히 에스프레소 머신의 압력을 관찰하던 A씨도 슬그머니 의자를 당겨 앉는 게 느껴졌다.
“그 정도였나요? 지금은 이렇게 시설이 완벽한데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홍보가 너무 안 됐던 게 문제였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싶어 가지고, 제가 직접 발로 뛰면서 개인 유튜버에 아프리카TV 비제이들까지 섭외하고, 공중파 ‘6시 내고향’ 방송에 사연을 귀찮을 정도로 보냈어요. 섬에 촬영하러 오면 지원도 아끼지 않았고요. 그렇게 평일에도 도시 손님들을 불러 모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숙박비를 과감하게 낮추기로 마을 주민들이랑 뜻을 모았지요.”

삽시도 워케이션 공유오피스 내부. 보령 | 양형모 기자

“그렇게 스트리밍하우스랑 한국어촌어항공단, 충남문화관광재단하고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게 바로 이 ‘3만 원 패키지’예요. 3만 원만 내면 우리 마을 연계 숙소에서 2박 3일 동안 묵으면서 아침 조식도 다 챙겨주고, 갯벌 체험에 실내 공예 프로그램까지 전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거죠.”
“3만 원이요? 사무장님, 요즘 서울 시내에서는 파스타 한 그릇에 에이드 한 잔 시키면 끝나는 돈입니다. 그 금액으로 섬에서 2박 3일을 먹고 자고 이 멋진 공유오피스까지 쓴다니, 이건 자선사업 수준 아닙니까?”
내가 진심으로 놀라 묻자, 임미자 사무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퍼주는 것 같아 보여도 이게 신의 한 수였어요! 가성비가 입소문을 타면서 2025년과 2026년 들어서는 문의가 폭주를 했습니다. 방문객이 전보다 53%나 늘어서 총 70명이 우리 마을을 찾았고 숙박비에 조식, 커피 판매까지 추가 소득만 1600만 원을 올렸으니까요. 전국 13개 어촌 워케이션 대상지 중에서 우리 삽시도가 무려 ‘전국 탑 3’ 우수사례로 뽑히는 기염을 토했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체험 프로그램’ 중 해양 환경정화와 연계된 항목에 시선이 꽂혔다.
“사무장님, 그런데 안내를 보니 해변에서 해양 유리 조각을 주워오면 실내 체험비를 무려 20%나 할인해 준다고 적혀 있네요? 이건 참 독특합니다.”
“그럼요! 섬 날씨가 늘 좋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힐링하실 수 있게, 해변에서 주워온 폐조개껍질이나 해양 유리, 버려진 유목을 재활용하는 실내 업사이클링 공예 프로그램을 저희가 직접 개발했어요. 손님들이 쓰레기를 직접 주워오시면 비용도 아끼고 본인들이 깨끗한 바다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보람도 느끼니까 만족도가 아주 최고랍니다. 그렇게 만든 예쁜 소품들이 이제 우리 마을의 새로운 소득 창출원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A씨가 안경테를 슬쩍 치켜올리며 깊은 사색에서 깨어난(자다 깨서 잠긴) 목소리로 한마디를 보탰다.
“환경 정화라는 공익적 가치와 20% 할인이라는 개인적 인센티브를 정교하게 맞물린 훌륭한 보상 매커니즘입니다. 유기된 유리 조각이나 유목의 업사이클링(Upcycling) 스토리는 주방에서 버려지는 식재료의 자투리나 껍질을 모아 최고의 풍미를 내는 가니시와 스톡으로 승화시키는 프랑스 누벨 퀴진의 테크닉과도 일치하는군요. 소비자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면서 마을의 자생적 소득원까지 구축하다니, 비즈니스 공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입니다.”
“A씨, 주방 레시피 이야기가 왜 또 거기서 나옵니까? 아무튼 사무장님,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 섬의 매력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군요.”
임미자 사무장은 기다렸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삽시도 자랑 하나 더 할 게요. 우리 삽시도 하면 역시 옛날부터 멸치가 최고지요! 사실 저도 원래 육지 처자였는데, 이 섬마을 멸치가 너무 맛있고 좋아서 매력에 푹 빠졌다가 결국 멸치 때문에 섬으로 시집까지 오게 된 사연이 있답니다.”
멸치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A씨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영국 유학 시절 북해의 생선 스톡을 연구하던 학자 특유의 본능이 깨어난 것이 분명했다. A씨는 아주 진지하고 정중한 말투를 끄집어냈다.
“멸치 때문에 시집을 오셨다니, 과연 주방의 역사를 바꿀 만한 낭만적인 서사입니다. 삽시도 멸치로 우려낸 조식 국물 맛이 벌써부터 학술적으로 기대되는군요.”
“학술적으로 꼭 기대해 주십시오.”
두 사람의 묘하게 진지한 대화를 지켜보며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숙소마다 와이파이를 구축하고 호텔식 침구류까지 갖춰놓았다는 사무장의 열정 덕분에, 삽시도 워케이션은 하나의 거대한 힐링과 일의 플랫폼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워케이션 오피스에서의 대화를 마친 후에는 충남문화관광재단 임종관 팀장, 박종찬 주임의 든든한 가이드로 5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삽지, 황금곰솔, 물망터 둘레길을 트레킹했다.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곳은 삽시도의 아름다운 숙소, ‘버디하우스’였다.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삽시도의 둘레길. 사진제공 |지엔씨21
펜션 앞에 펼쳐진 아담한 저수지 역시 장관이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수면 위로 물안개가 피어나고, 가마우지와 갈매기 같은 새들이 평화롭게 노닐다가 후드득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자연이 그린 한 편의 거대한 명화였다. 누군가 물밑을 보며 외쳤다 “엇, 저기 붕어 봐라!”
이 아름다운 공간을 손수 가꾸어 온 주인이자 사진작가인 김태연 씨와 잠시 ‘평화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A씨가 기계 그물체험에서 건져올린 자연산 생선들의 선도 유지를 위해 횟감 보관을 체크하러 간 덕이다).
“숙소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공간 곳곳에 서린 취향과 손길 덕분에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묵는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저수지의 새들과 붕어들까지 마치 작가가 배치해 둔 완벽한 오브제 같습니다.”

김태연 작가의 작품. 사진제공 | 김태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삶의 흔적들을 공간에 조금씩 녹여두었을 뿐인데, 여행자분들이 그 비밀을 알아봐 주실 때마다 참 큰 보람을 느껴요.”
그는 이 외딴 서해의 섬 삽시도에 정착해 카메라를 들게 된 개인사도 들려 주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예술적 기반을 닦았던 그는, 사진을 너무나 좋아해 뒤늦게 사진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열정파였다. 그러던 중, 삽시도로 시집와 40년 넘게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친언니의 일을 돕기 위해 우연히 이 섬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삽시도의 아름다운 숙소, 버디하우스. 보령 | 양형모 기자

그동안 묵묵히 담아온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지만 마땅한 통로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 수소문 끝에 보령문화원의 문을 두드렸고, 1년여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보령문화원 초대전 초대작가로 당당히 선정돼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주었다.
“감사하게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정식 개인전을 열게 되었어요. 곧 보령문화의전당 기획전시실에서 시작한답니다.”
김태연 작가의 눈에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반짝’ 서렸다. 이번 개인전의 타이틀은 ‘삽시도, 수많은 날들 중 하루’다. 그가 섬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심혈을 기울여 촬영한 70여 점의 사진 작품들이 커다랗게 출력되어 전시장 조명 아래서 빛을 발할 채비를 마쳤다.
“70여 점이나 되는 사진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펜션 복도에서 보았던 액자가 범상치 않던데요.”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자, 김태연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시에 숨겨진 가슴 저릿한 비밀을 들려주었다.
“네, 맞아요.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을 감싸고 있는 ‘액자’에도 있어요. 제가 매일 삽시도 해변을 걸으며 직접 수집한 해양 쓰레기들, 그러니까 먼 바다에서 밀려온 폐어구, 유목, 조개껍데기, 폐로프 같은 것들을 오랜 시간 손으로 하나하나 엮고 다듬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브제 액자’를 만들었거든요. 섬이라는 원초적 소재에 자연 그대로의 옷을 입힌 셈이지요.”
바다가 내뱉은 상처이자 흉터인 폐기물들을 작가의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 섬의 기억을 담는 아름다운 테두리로 승화시켰다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단순한 새활용(업사이클링)을 넘어, 환경에 대한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숭고한 예술의 범주로 끌어올린 의미있는 성취였다.
“버려진 것들도 다시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가는 주홍빛으로 변해가는 저수지에 시선을 주며 말을 이어갔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바다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시 한번 환경을 바라보았으면 해요. 삽시도의 풍경과 시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소중한 가치들을 함께 느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아름다운 삽시도의 일몰. 사진제공 |지엔씨21
전시는 보령문화의전당을 시작으로 6월 1일부터는 대천항 터미널, 6월 16일부터 30일까지는 대천역 대합실로 장소를 옮겨 한 달 넘게 순회 전시를 이어간다고 한다.
파도에 쓸려온 쓰레기조차 기억의 액자로 품어내는 따뜻한 예술가가 사는 섬. 버디하우스에서의 하룻밤은 메마른 영혼을 채워주는 선물 같은 밤으로 깊어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삽시도를 떠나 인근의 청정한 섬 고대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속하는 고대도 선착장에 내리니 옹기종기 모인 오렌지 색깔 지붕들이 이국적인 독일의 어촌 마을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이 섬의 살아있는 역사 길잡이인 고대도 선교센터의 정수목 목사가 반갑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정 목사는 우리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섬의 유래에 대해 유쾌한 이야기 한 자락을 꺼냈다.
“고대도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겨서 예전엔 주민들이 ‘곧은 섬’이라고 불렀어요. 그 발음이 변해 고대도가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영어 ‘God(하나님)’에 ‘사랑 애(愛)’ 자를 더해서 ‘갓애도’라고 부른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섬’이라는 뜻이지요.”

칼 귀츨라프 해양역사문화기념관. 사진제공 |지엔씨21
“다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라고 하면 토마스나 언더우드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들보다 무려 34년, 53년이나 앞서 정식으로 복음을 들고 이 땅을 밟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바로 독일인 칼 귀츨라프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지요. 1832년 7월, 이곳 고대도가 그 위대한 발걸음의 첫 정박지였습니다. 조선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불과 19일간만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주민들에게 성경과 약품을 나눠주었고, 주민인 ‘양이’라는 사람에게 반나절 만에 한글을 배워 최초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고대도 선교센터에서 칼 귀츨라프 선교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수목 목사. 사진제공 |지엔씨21

정수목 목사. 보령 | 양형모 기자
“그리고 두 분이 꼭 아셔야 할 귀츨라프 선교사의 또 다른 엄청난 업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 고대도가 ‘대한민국 감자의 진짜 고향’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자의 고향이요? 감자 하면 강원도 아닌가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정 목사가 고증이 담긴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냈다.
“보통 청나라를 통해 감자가 들어왔다는 북방 전래설이 유명하지만, 규장각의 ‘원저보’ 기록을 보면 명확히 나옵니다. 1832년 7월 귀츨라프 선교사가 고대도 주민들에게 씨감자를 잘라서 심는 재배법과 익혀 먹는 조리법을 직접 시연하고, 한문으로 제조법까지 적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그는 조선에 오기 전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즉, 서양을 통해 감자가 처음 들어온 전래지가 바로 이 작은 섬 고대도인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버리던 야생 머루와 포도로 와인 빚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의사로서 주민 60여 명을 치료해 준 미식과 의료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요리 학자 A씨의 안광이 번쩍하고 빛났다. A씨는 안경테를 고쳐 쓰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식문화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씨감자의 단면을 절단해 전분질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재배법을 이식하고, 야생 포도의 효모 발효 매커니즘을 전파했다는 것은 척박한 섬 환경에서 구황작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했던 독일 경건주의 신앙관의 과학적 발현으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목사님, 미식학적 고증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대한민국 최초의 감자박물관이 건립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는 A씨의 전문적인 분석에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어디 가시면 감자박물관 여론 좀 꼭 만들어 주세요!”라며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선교센터에서의 뜨거웠던 역사 이야기를 뒤로하고, 우리는 꼬르륵 소리를 정직하게 내는 배를 움켜쥔 채 고대도 마을 협회 식당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친숙하면서도 반가운 한식 뷔페 스타일의 푸짐한 밥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접시를 손에 들고 본격적인 배식에 나섰다. 싱싱한 샐러드를 시작으로 알맞게 익은 김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멸치볶음, 바다 향 가득한 해조류 무침을 차곡차곡 담았다. 메인 요리 격인 매콤하고 부드러운 아구찜과 붉은 양념이 군침 돌게 하는 밥도둑 양념게장이 푸짐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손이 저절로 바빠졌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쌀밥을 접시 한편에 잔뜩 퍼 담은 뒤, 맑고 시원한 바지락 국까지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상 위에 올라온 모든 재료는 순도 100%의 ‘메이드 인 고대도(Made in Godaedo)’라고 했다. 쌀조차 고대도 땅에서 해풍을 맞으며 직접 자란 쌀이라는 설명에 상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두툼한 아구 살점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시원한 바지락 국물로 입가심을 한 뒤, 눈을 감고 깊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A씨, 이 접시 좀 보십시오. 이건 단순한 뷔페가 아닙니다. 아구찜의 매콤함과 바지락의 시원함, 그리고 해조류의 싱그러움까지 고대도의 동서남북 바다를 한 번에 축약해 놓은 거대한 미식 지도예요. 심지어 이 흰쌀밥마저 섬에서 자란 녀석이라니, 밥알 하나하나가 섬마을의 자급자족 낭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내 감탄에 맞은편에서 양념게장을 단정하고 섬세한 젓가락질로 공략하던 A씨가 안경테를 슬쩍 밀어 올렸다.
“간만에 동의합니다. 이 밥상의 진정한 가치는 ‘울트라 로컬(Ultra-local) 인프라’에 있습니다. 종자부터 수확까지 섬 내부에서 완결된 고대도 쌀은 해풍의 영향으로 아밀로스 함량이 적당해 호화 상태가 아주 이상적이지요. 씹을수록 나오는 포도당의 단맛이 아구찜의 캡사이신 성분을 부드럽게 중화시켜 줍니다. 멸치볶음의 칼슘 밀도와 해조류 무침의 미네랄 배합 역시 훌륭한 밸런스입니다.”
“역시 요리 학자다운 분석이십니다. 유학 시절에 유기농 뷔페도 많이 가보셨을 텐데, 이런 순도 100% 현지 조달 밥상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A씨는 맑은 바지락 국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영국이나 유럽의 미식 트렌드 중에서도 식재료의 이동 거리를 제로로 만드는 ‘제로 마일 푸드(Zero-mile food)’를 최고로 칩니다. 선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최고급 레스토랑의 사치스러운 매커니즘을 이곳 고대도에서는 마을 뷔페라는 매우 소박하고 정겨운 방식으로, 그것도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는 셈이지요.”
“오, 제 접시 위의 아구찜과 게장이 졸지에 세계적인 트렌드의 정점이 되었군요. 역시 A씨와 함께 먹으면 평범한 뷔페도 5성급 호텔 다이닝으로 변하는 마법이 일어납니다.”
나는 게장 양념을 밥에 슥슥 비벼 한 입 크게 넣고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A씨가 말했다.
“마법도 좋고 쌀밥의 낭만도 좋습니다만, 국장님이 고대도 미식 지도의 시적 의미를 탐구하는 사이에 제가 아구찜의 실한 아구 살점을 두 조각을 더 선점했습니다. 아미노산 공급은 결국 타이밍이니까요.”
만족스러운 식사 후, 우리는 오후 일정에 따라 귀츨라프 기념공원(안항 기념공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나섰다. 뜻밖에도 우리의 이동 수단은 정 목사가 직접 운전하는 트럭이었다.
“자, 뒤쪽 짐칸에 올라타세요! 섬 동네 골목길은 이 녀석이 최고입니다!”
정 목사의 호탕한 외침에 나와 A씨는 트럭 적재함에 몸을 실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사방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갯바람과 함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온몸의 세포와 뼈마디가 리드미컬하게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나이에 트럭 뒤에 태워져 실려 가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수십 년 전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군대 시절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이 나이에 섬에서 다시 군대 향수를 느낄 줄이야.’ 길바닥이 요동칠 때마다 엉덩이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이 무질서한 덜컹거림은 불쾌하기는커녕 짜릿한 유원지의 기억까지 소환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스릴을 만끽하며 우리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귀츨라프 기념공원으로 가는 길의 노면 상태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무척 좁고 구불구불했다. 정말 딱 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다. 덩치 큰 SUV 차량이라 해서 못 갈 것은 아니었지만, 길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 사람이 호기롭게 차를 몰고 들어왔다간 좁은 커브길에서 차 옆문을 사정없이 긁어먹기 십상인 난코스였다. 과연 정 목사의 노련한 트럭 핸들링이 왜 필요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좋아~.
내 혼잣말을 들었을까. A씨는 적재함 난간을 잡은 채, 늘 그렇듯 얼음장처럼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차체의 수직 진동이 제 척추의 압박률을 실시간으로 높이고 있습니다만, 이 거친 댐핑(Damping) 매커니즘은 과거 영국 유학 시절 스코틀랜드의 험난한 고원 지대에서 유기농 식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구형 디펜더 차량을 타고 달리던 오프로드의 추억을 소환하는군요. 당시의 요동치던 원심력에 비하면 정 목사의 드라이빙 밸런스는 아주 안정적이고 합법적입니다.”
“아니, A씨는 군대 생각은 안 나고 식재료 조달하던 영국 디펜더 생각만 나십니까? 정말 못 말리는 요리 학자이십니다.”
한바탕 유쾌한 소동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귀츨라프 기념공원 초입에 들어섰다. 푸른 하늘과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목조 돛배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 목사가 트럭에서 내려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배가 바로 귀츨라프 선교사가 타고 들어온 영국 선박 ‘로드 애머스트호’를 재현한 모형 배입니다. 이 섬의 대표적인 포토존이기도 하지요.”
배를 지나 공원 안쪽으로 좀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허공을 가르는 ‘선(Line)’으로만 이루어진 현대적인 철제 예술 조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벽도 지붕도 없이 오직 선으로만 교회의 형상을 그려낸 모습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넋을 잃고 바라보며 감탄하자, 정 목사가 흥미진진한 세계사적 반전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타고 온 영국 선박 ‘로드 애머스트호’를 재현한 모형 배. 사진제공 |지엔씨21

스페인 작가 후안 가라이사발이 기증한 ‘도시의 기억, 베를린’ 축소 작품. 사진제공 |지엔씨21
“스페인 작가가 왜 독일의 교회를 이 먼 한국의 작은 섬 고대도에 전시하게 된 건가요?”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자, 정 목사가 작가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작가가 전 세계를 돌며 사라진 역사적 건축물을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하던 중, 1832년 독일 청년 귀츨라프가 한국의 고대도라는 섬에 정박해 한글 주기도문을 번역하며 독일(베를린)과 한국을 역사적 선으로 연결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겁니다. 깊은 영감을 받은 작가는 두 공간을 예술로 잇기로 결심하고 이 설치물을 고대도에 기증했지요. 진짜 미스터리는 그다음입니다. 실제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이 조형물의 원본 부지 바로 쌍둥이 자리에 현재 ‘북한 대사관’이 서 있거든요.”
“네? 북한 대사관이요?”
뜻밖의 반전에 나와 A씨 모두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목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 들쭉날쭉한 철제 선들이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분단의 비극을 경험한 두 나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고자 허공에 꿰매어 놓은 거대한 봉합선처럼 보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대천항으로 돌아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멀어지는 고대도의 오렌지빛 지붕들과 귀츨라프 공원의 풍경이 서해바다로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이틀간의 강행군으로 몸은 노곤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 영혼만큼은 바다 수평선처럼 한없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고요한 솔숲의 위로를 건네던 삽시도 둘레길, 사방으로 물보라를 튕기며 야성을 뿜어내던 그물체험과 바다를 통째로 삼킨 듯 탄력 넘치던 싱싱한 회의 맛, 머무는 것 자체로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던 버디하우스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이 먼 이국땅까지 찾아와 기독교 복음과 씨감자의 축복을 선물해준 고대도의 귀츨라프 선교사까지. 이 섬들이 품은 이야기는 도시의 삭막한 일상에 지쳐 있던 여행자들에게 완벽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내 옆에서 뱃머리가 만들어내는 포말을 바라보던 A씨가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세계사적 평화의 의미도 훌륭합니다만, 제 생체 시계는 이제 현실로의 복귀를 가리키고 있군요. 섬마을의 제로 마일 푸드가 준 미식학적 감동을 에너지 삼아, 내일부터는 다시 냉혹한 비즈니스의 일상에서 각자의 기어비를 올려야겠지요. 국장님도 ‘힘들다’, ‘피곤하다’ 타령은 그만하시고 돌아가서 이 풍성한 추억들을 정교하게 기록해 보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돌아가면 A씨의 깐깐한 분자 구조 강의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군요.”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대도. 사진제공 |지엔씨21
보령(삽시도·고대도) |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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