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고전파입니까? ...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3]

입력 2023-01-30 10:37: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크게보기

전설들이 만들어낸 전설,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의지, 따뜻함과 친절함, 신의를 드러낸 박강현의 ‘토니’
카르멘과 알돈자의 향기, 믿고 본 김소향의 ‘아니타’
‘고전’.
어떤 느낌이신가요. 올드하다? 고리타분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없다?(대표적으로 돈키호테, 모비딕 같은 소설이 있습니다)

고전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극단적 고전 우월주의’입니다. 이런 분들은 고전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나머지 요즘 작품들을 맥락 없이 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음악 분야에 이런 분들이 다수 포진하고 계십니다.

“지휘하면 카라얀이지. 요즘 젊은 애들이 하는 게 어디 음악이여?”라든지 “김광석을 들어 봐. 요즘 노래가 노래 같은지” 같은 거. 어디서 좀 들어본 얘기 아닌가요.

이런 분들에게 ‘고전’은 사실 알고 보면, 본인의 감수성이 한창 솟구치던 10~20대 시절에 즐겨 들었던 음악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시선은 반대로 ‘무조건 고전 무시’입니다. 이 분들은 아무래도 젊은층이 많은데 요즘 것과 과거의 것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셰익스피어? 아우! 문장도 올드하고, 스토리도 뻔해. 요즘 일일 드라마도 그것보다 낫겠다”라든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요즘엔 초등학생들도 잘만 치더만”하는 식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도 요즘 보병이 들고 다니는 대전차무기 한 방에 박살날 허접한 배에 불과할 겁니다.

마지막 시선은 고전은 고전대로, 요즘 작품은 요즘 작품대로 두루 볼 수 있는 시선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난 평생 비틀즈 팬인데, 요즘 BTS 음악도 참 좋더라고”하는 분들이겠네요.


사실 ‘고전’이란 말은 현대적 시점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당시 최첨단의 예술작품들이었으니까요.

따라서 고전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당시의 시선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 시대에 대해 조금 공부를 해두면 더 재미있게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한 걸음 물러나 현재의 눈으로도 찬찬히 살펴봅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하! 이래서 고전이 고전이로구나!”하며 무릎을 치게 됩니다.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는 대표적인 고전 뮤지컬 작품입니다. 195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첫 선을 보였으니 66년이나 된 뮤지컬이죠. 그러니까 오늘날의 관객들은 60년이 훌쩍 넘은, ‘흑백영화’ 같은 작품입니다(1961년에 나온 로버트 와이즈, 제롬 로빈스 감독의 영화는 컬러영화였습니다만).

레너드 번스타인의 작곡, 스티븐 손드하임의 가사, 뉴욕시립발레단 예술감독 제롬 로빈스의 안무, 극작가 아서 로렌츠. 그야말로 당대의 ‘월드 드림팀’이 의기투합한 작품입니다. 이 정도라면 펠레, 마라도나, 메시, 피구, 지단이 한 팀에서 뛰는 느낌입니다.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래리 버드, 칼 말론, 존 스탁턴,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이 뛰었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미 농구 드림팀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는 전형적인 2막 구성이지만 넘버는 17곡 밖에 안 됩니다. 그나마 프롤로그와 피날레를 합쳐서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부실 수준. 최근 보았던 한 뮤지컬 작품의 넘버는 50곡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몇 안 되는 넘버 중 상당수가 뮤지컬 역사상 최고의 명곡들로 꼽힙니다. 뮤지컬을 잘 모르는 분들이 팝송으로 오해하곤 하는 ‘투나잇’, ‘마리아’, ‘아메리카’와 같은 넘버들이 웨스트사이드스토리 1막에 집중 포진되어 있습니다.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보며 첫 느낌은 ‘무대가 참 아름답다’였습니다.


무대의 주 배경은 외국 빈민가의 꼬질꼬질한 다세대 주택입니다. 그런데 이 암울하고 더러운 빈민촌에 어둠이 깔리고, 조명이 마법을 부리면 마치 판타지 속의 공간처럼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웨스트사이드스토리가 다른 뮤지컬 작품들, 심지어 다른 고전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넘버 못지않게 안무가 전면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클래식 거장 번스타인이 작곡한 음악답게 가사 없는 기악의 무게감이 더해집니다.

제롬 로빈스의 안무 표현은 뮤지컬의 예술적 경지를 두 차원쯤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발레 전문가답게 배우들의 안무에서는 발레의 역동적인 동작이 팍팍 느껴집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번스타인이 쓴 넘버들은 반주를 의식하지 않으면 오페라의 아리아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클래시컬합니다. 노래없는 배우들의 군무는 마치 발레 공연을 보는 것 같지요. 이 작품을 객석에서 보실 기회가 생기거든 꼭 한 번 눈여겨 보세요.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겁니다.

제롬 로빈스의 안무는 발레가 베이스이다 보니 배우들의 움직임이 큽니다. 팔을 양쪽으로 쭉쭉 벌리고, 쉼 없이 턴과 점프를 합니다. 또 다른 뮤지컬 안무계의 거장 밥 포시와는 완전 반대적인 상황입니다.

박강현의 토니는 상당히 근사했습니다. 제트파 창설멤버이자 전 리더지만 환멸(또는 싫증)을 느끼고 떠난 토니라는 인물의 특성을 잘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갱단을 스스로 벗어날 만큼 의지가 강한 데다 또래의 친구들과 달리 미래를 설계할 줄도 아는 토니는 파티장에서 처음 만난 마리아와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들 정도로 순수(혹은 무모함)한 면도 지닌 청년이죠.

그런 점에서 박강현의 토니에서는 의지, 따뜻함과 친절함, 예의와 배려, 신의가 빠짐없이 전해져 왔습니다.

박강현의 노래실력은 정평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음색을 갖고 있는데, 소리 볼륨이 풍성해 배우들의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펑펑 뚫고 솟아오르더군요. 음정도 정확해 음악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한재아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보았습니다. 맑고 투명한 소프라노의 소리를 갖고 있더군요. 박강현과의 듀엣에서는 두 배우의 소리 밸런스가 잘 맞아 감동이 증폭되었습니다.

김소향의 아니타는 꽤 기대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배우니까요.

붉은 의상을 걸친 김소향의 아니타(향니타라고 부르더군요)에서는 카르멘과 ‘맨 오브 라만차’ 알돈자의 향기를 동시에 맡을 수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만 화려하지만은 않은,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만은 않은, 두 주인공을 비극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니타를 김소향은 본능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김소향의 아니타를 보고 있으면 이 캐릭터가 손에 딱 잡히는 통렬한 ‘그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날 인상적이었던 한 명의 배우를 더 꼽자면 베르나르도의 임정모.

샤크파의 리더다운 강력한 포스를 완벽하게 두르고 나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베르나르도. 갱단의 리더지만 상남자의 매력이 풀풀 날립니다.

PS.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관객들은 무대 위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구질구질한 건물을 보게 됩니다. 이 건물은 3~4층의 높이로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각 방마다 창문으로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대화를 하는 사람, 화장을 하는 사람, 기지개를 켜는 사람, 뭔가 불안한 듯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등등. 어찌 보면 영상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진짜 배우들 같기도 하고. ‘과연 무얼까’하는 사이에 공연이 시작되어 버립니다.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 편은 공연을 보자’ 프로젝트입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쇼노트




오늘의 핫이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