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족’ 아줌마, 좋은 아내-좋은 엄마 노릇하기 힘드네
화제를 돌려 슬쩍 가족 얘기를 물어봤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 “벌써 결혼 생활 20년째네요. 하긴 제 나이가 이젠 50줄을 바라보고 있으니깐. 어휴, 징그러워….(웃음)”
이운임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 5월 결혼했다. 남편은 평범한 사업가다. 광고사업체 메소드를 운영하는 전준태(54)씨와 슬하에 아들 두명을 뒀다. 둘 모두 엄마처럼 운동선수를 꿈꾸진 않는다. 큰 아들 승민(18)군은 미대 지망생으로 지난 겨울 수능 시험을 치렀다. 생각보다 점수가 잘 안나왔다며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엄마’로서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둘째 아들 승휴(16)군은 평범한 고교 1년생이다.
“승민이가 좀 더 시험을 잘 봤어야 했는데. 그 녀석이 미술에 꽤 소질이 있어요. 운동은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죠. 개구쟁이 둘째도 너무 귀엽죠.”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게 늘 아쉽다. 연중무휴 식당에서 근무하다보니 얼굴을 자주 마주할 수 없다. 그나마 요즘은 수험생 아들을 둔 덕택에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만 평소 하루 종일 서 있다보니 예전 운동할 때 아팠던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온다며 울상을 짓는다. “미안해요.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좋은 아내가 되지도 못하고 있죠. 참, 나쁜 사람이죠?”
사실 이운임은 ‘투잡족’이다. 식당에서 일하기 전부터 의류업체 와룡상사에서 스포츠 용품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익숙한 배구 코트가 아닌 사회생활을 하려니 처음에는 겁도 많이 났고, 어색했지만 시간이 차차 해결해줬다.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감이 생긴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했다. 그녀가 현역으로 뛸 때 활동했던 옛 배구 기자들이나 배구인들이 이런 모습에 모두 의외라며 깜짝 놀란단다. “궁금하면 그 분들이 식당을 찾아오셔서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그런 게 너무 좋아요. 그저 감사할 뿐이죠. 아직도 절 잊지 않았다는 것도요.”
○ 스포츠 미녀스타 원조…1984년 LA올림픽이 가장 아쉬워
“혹시 그거 아세요? 예전의 인기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동아가 선정한 ‘미녀 스포츠 선수’ 부문에 제가 줄곧 순위권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요.”
문득 궁금해진다. 미녀 스타인데, 스캔들은 없었을까. 얼굴이 발개진 그녀는 조심스레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모 탤런트와의 소개팅 얘기였다. “꼭 말해야 하나? 누군지는 잘 기억이 안나요. 언젠가 어떤 지인께서 탤런트와 중매를 서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자리에 나온 그 분 옷차림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비둘기빛 반짝이 무대 의상 같은 거요.(웃음) 저희는 운동만 해서 그때는 ‘때’가 묻지 않았거든요. 단칼에 ‘애프터 신청’을 거절했죠.”
배구 얘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운임은 실력과 미모를 두루 갖춘 1980년대 최고의 선수였다. 지금도 식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코트에서 맹활약하던 이운임을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를 할 때가 가장 흐뭇하다고 했다. 그럴 때면 고기 한점이라도 더 올려주고 싶다는 농도 던진다. 진솔한 여유가 묻어난다.
전남 나주 영강초등학교, 광주 동성여중, 광주여상을 거쳐 1980년 여자실업배구단 미도파에 입단해 1989년 11월 대농에서 은퇴할 때까지 꼭 10년간 활동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달라는 물음에 이운임은 2가지를 공개했다.
첫 번째는 1986년 대통령배 실업배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한 사실. 공격수와 달리 세터는 눈에 띄는 포지션이 아니다. 그러나 신장이 170cm에 불과한 그녀는 끊임없는 연습과 악바리 같은 정신력으로 지금도 쉽게 볼 수 없는 ‘공격형 세터’로 명성을 떨쳤고, 한국배구 최초의 세터 MVP가 됐다.
두 번째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놓친 것이다. 러시아, 중국, 일본, 페루 등 쟁쟁한 강호들이 모인 가운데 최선을 다했지만 일본에 아쉽게 패해 5위에 그쳤다. “이제야 공개할 수 있네요. 사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그 때는 각 팀 감독님들의 반목과 갈등도 있었고 선수들 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처럼 선수 차출 협조도 잘 안됐고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요. 올림픽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저희에게 꿈의 무대였거든요. 요즘 애들이 그걸 알려나? 아무튼 큰 족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여전히 이운임은 배구계와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배구선수 출신들의 모임인 ‘진흥회’에서 김화복 전 대한배구협회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박선옥, 박미희, 장윤희 등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고, 전국 대회에 출전해 무패 행진을 구가하는 종로 어머니 배구단을 10년째 이끌며 코트 인생을 이어간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제겐 배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지금도 가족만큼이나 가장 소중한 부분이죠. 지금도 배구 생각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행복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하고, 슬픈 기억을 하며 소리 없이 울기도 하고 말이죠.”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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