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균의 7080 야구] 심판과 몸싸움한 감독, 대통령 한마디에 쇠고랑

입력 2010-09-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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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꼴찌팀 삼미는 1983년 여전히 열악한 전력이었지만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즌 도중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사령탑이던 김진영 감독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6월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였다. 나는 삼미 선발투수로 MBC 유종겸과 팽팽한 투수전을 펼쳤다. 0-1로 뒤진 8회초 2사만루. 최홍석의 좌전안타 때 3루주자 이영구와 2루주자 이선웅이 동시에 홈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김동앙 주심은 2루주자가 홈에 들어온 것보다 1루주자 김진우가 3루에서 태그아웃된 시점이 빨랐다고 판단해 1득점만 인정했다.

그러자 김진영 감독이 덕아웃을 박차고 나가 주심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흥분한 나머지 백스톱 뒤에서 경기속행을 종용하던 이기역 심판위원장을 향해 그물에다 두발당성을 날렸다.

이 경기는 TV로 생중계됐다. 당시 대통령이 이 장면을 보고는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대통령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는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결국 다음날인 2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롯데전을 치렀는데 경기 후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김 감독은 폭력행위로 유니폼을 입은 채 연행됐다.

그 과정에서 선수단과 형사들이 마찰을 일으켰다. 야구장에서 벌어진 일로 구속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유니폼을 입은 채 구속된다는 것은 야구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여서 선수단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김 감독은 유니폼 입은 모습으로 구속되는 일은 면했지만 다음날 서울로 이동해 구속되고 말았다. 프로야구 감독이 야구장에서 심판과 몸싸움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해태와 전기리그 1위를 다투던 삼미는 이후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은 구단 고위층에 몇 차례나 감독의 현장복귀에 관해 건의 했지만 당시 시대상황이 그래서인지 구단 고위층도 눈치를 보면서 “자숙하라”는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선수들은 조급해졌다. 나를 비롯한 고참급 선수들의 주도하에 급기야 선수단을 규합했다. 대전 경기를 앞두고 이재환 코치와 이선덕 코치 등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호텔 앞에 모인 가운데 나는 선수단을 대표해 당시 허영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이 복귀하지 않으면 경기를 보이콧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삼미 선수들은 감독만 있으면 우승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경기불참 D-데이 전날부터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김 감독의 현장복귀가 가능하다는 구단 고위층의 말을 전해 듣고는 다시 경기에 나섰다.

김 감독은 6월 11일 약식기소 100만원 벌금형으로 석방됐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령탑의 공백이 생기면서 어쩌면 삼미의 유일한 우승기회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이해 못한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는 선수단의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선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나가 됐다. 선배로서 그 일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나는 시즌 후 트레이드라는 ‘보너스’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삼미는 스타군단은 아니었지만 선수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팀워크를 만들며 83년의 돌풍을 일으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전력이 떨어지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팀 구성원들이 믿음과 신뢰로 하나가 된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임 호 균

삼미∼롯데∼청보∼태평양에서 선수로, LG∼삼성에서 코치로, MBC와 SBS에서 방송해설을 했다. 미국 세인트토머스대학 스포츠행정학 석사. 선수와 코치 관계는 상호간에 믿음과 존중, 인내가 이루어져야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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