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르고뉴 와인 명가 ‘부샤 페레 피스(Bouchard Pere & Fils)’의 필립 프로스트 와인 메이커가 의미 깊은 와인을 한 병 들고 한국을 찾았다. ‘포마르 프리미어 크뤼 루지앵(Pommard 1er Cru Rugiens)’ 1929년 빈티지가 그 것. 무려 80년 된 와인이다.
일반 소비자들은 80년 된 와인이라면 당연히 상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선물 받은 와인을 아무데다 뒀다가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발견하고 오픈 해 마신 뒤 이상해진 와인 맛에 얼굴을 찌푸린 경험이 있을 터.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와인은 쌩쌩하게 살아 있었다. 오랜 세월 보관으로 병 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이 와인 잔 속에 따라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윽한 향과 생생한 산미에 함께 자리한 취재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오래된 와인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 보니 감탄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1929년은 세계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해다.
필립 프로스트 씨는 “지금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1929년 빈티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도 경제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이 와인을 들고 왔다”고 설명한다.
장기 숙성 와인을 생산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고급 와인 또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맛이 꺾이기 마련. 그렇기에 이 와인의 힘은 감탄사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프로스트 씨의 반응은 별거 아니란다.
그는 “1846년 빈티지도 상태가 좋다. 이 와인은 셀러에 7000병을 보관하고 있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30년 마다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다. 그래서 자신 있게 좋다고 말할 수 있다”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부샤 페레 피스의 기술력과 테루아가 만들어낸 합작품에 대한 대단한 믿음과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필립 프로스트
부샤 페레 피스는 1731년 당시 직물 사업을 하던 미셸 부샤가 아들과 함께 설립한 전통과 역사의 와이너리. 네고시앙(중개상)이면서 소유한 포도밭에서 직접 와인을 생산한다. 1978년 합류한 프로스트 씨는 1992년 수석 와인 메이커가 된 후 지금까지 이 곳의 와인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
“부샤 페레 피스는 130ha의 포도밭을 갖고 있고, 별도도 120ha의 포도밭에서 와인을 구매해 생산한다. 구입한 와인도 자사 포도밭 와인과 똑같은 철학으로 만든다. 70%가 그랑크뤼(특등급)와 1등급일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1995년 샴페인 생산자 죠셉 앙리오가 부샤 페레 피스를 인수하면서 변화는 없었을까. 그는 이를 프랑스 축구 대표팀에 빗대어 얘기한다.
“프랑스 축구팀을 보면 각각의 멤버들은 잘하는데 모이면 잘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셉 앙리오와의 협업이 가장 중요했다. 결과는 좋았다. 1995년 이전에는 단지 좋은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였다면 이후에는 더 좋은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가 됐으니까. 2005년 신축한 와이너리에서는 더 좋은 와인이 나오고 있다.”
‘퀴베(Cuvee)’의 세분화는 더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토대가 됐다.
퀴베는 밭을 세분화해 각각의 특징을 줘서 만든 와인을 일컫는 용어. 2005년 이전에는 70개였던 퀴베가 이후에는 146개로 2배 이상 늘었다. 세분화된 테루아를 반영한 와인은 시장에서 더 좋은 반응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와인에 들어있는 알코올은 각종 암을 유발한다는 내용의 책자를 나눠주는 등 반 와인 정책을 펼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한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는 “프랑스 현지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와인이 중요한 돈이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를 막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다만 대통령이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글·사진=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