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제1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가 한창 진행 중인 서울 광화문 근처였다. 처음엔 “나 같이 재미없는 사람을 뭐 하러 만나요~”라며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약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말했다. 또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강산이 여섯 번 변했어도 자신이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었음에, 현재에도 영화인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 “실감나지 않은 60주년, 앞으로가 더 중요”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이한 안성기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라며 “아마 나는 앞으로 할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 뒤를 돌아보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 예전에도 나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세월의 흐름이 믿기지도 않은 것도 사실인데….(웃음) 늘 당장 내가 하는 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많이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지금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렇다고 예전 일을 기억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모든 게 좋은 추억이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죠. 그 때도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했기에 오늘의 나도 있는 게 아닐까요? 과거의 일들이 바탕이 되고 근간이 됐기에 지금은 후배도 양성하고 어려운 이웃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이런 행보를 걷고 있다는 게 더없이 행복해요.”
1957년 아버지의 친구인 김기영 감독 작품 ‘황혼열차’로 데뷔를 하게 된 안성기는 아역배우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영화 ‘10대의 반항’(1959), ‘하녀’(1960) 등에 출연했던 그는 ‘10대의 반항’로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안성기는 “그 때 조그마한 게 잘 했나봐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 때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 뜨면 지방에 와 있고, 또 눈 뜨면 차나 열차에 있었으니 기억이 나질 않죠. 그리고 그 때는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즐거우니까 그것만 기억을 하죠. 하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황혼열차’ 찍을 때 고아원 부엌에서 쌀을 몰래 가져오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게 얼마나 재밌어. 막 기어 다니고 하니까. 하하. 그리고 중랑천 철교 초입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 때 뭐 CG가 어디 있겠어. 그냥 밑에서 누가 담요 같은 거 들고 있으면 그냥 뛰어내렸지. 그리고 무엇보다 필름이 남아있으면 기억을 하겠는데 없는 것들도 있으니 또 아쉽기도 하죠. 투자자나 제작자가 개인적으로 보존하려고 했던 것 외에는 거의 유실됐어요.”
중학교 때까지 아역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자 역할 자체가 제한적이 됐고 캐스팅제의도 줄었다. 안성기는 “그러던 중에 사춘기가 늦게 찾아와서 성격도 많이 변했다”라며 “연기를 하는 게 싫어졌다. 학교에 있으면 영화 제작부장이 와서 나를 데려가는 게 너무 싫더라.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충무로를 떠났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그는 “그 때는 베트남이 취직도 잘 되고 해서 대학교에서 베트남어학과 학생을 많이 뽑았다. 50명씩 뽑고 그랬으니까. 한 번 잘 해보자는 생각에 열심히 했고 과에서 1등으로 졸업을 했다”라고 말했다. 안성기는 장교가 돼 베트남에 갈 생각으로 육군학생군사학교(ROTC)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군 복무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갈 수가 없게 됐다. 전공을 살릴 길이 없어졌다. 대기업에 취업을 하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무엇을 할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다시 ‘영화’가 떠올랐다고.
“말뚝 박을 생각은 안 했냐고요? 나 군 생활 엄청 잘했어요. 하하. 임관할 때 성적이 우수해서 참모총장 상도 받기도 하고 인사고과도 좋았다고. 그런데 ‘군대’라는 집단이 나랑 잘 안 맞더라고요. 생각해보면 내가 직장생활을 했으면 잘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출퇴근이 내 체질이 아니야. 하하. 차라리 현장에서 부딪히며 일하는 게 낫지.”
안성기는 1977년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복귀하고 찍은 4편의 영화 성적은 좋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만난 작품이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다. 당시 그가 맡았던 ‘덕배’ 캐릭터는 그 시대의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어온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후로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배창호 가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9) 등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펼쳤다.
안성기는 당시 작품이 주는 메시지에 중점을 둬 출연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는 에로시티즘 영화 혹은 코미디, 멜로 영화가 주로 이뤘던 터라 이 모습을 지켜본 안성기는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라는 가치를 다시 올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였어요. 그런데 내가 다시 영화인으로 돌아왔던 1970년대 말에는 반공영화, 멜로영화, 순수예술영화만 찍을 수 있었어요.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검열이 강화되니 정권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었죠. 그러니 극장에는 이상한 영화들만 걸려있잖아요. 사람들이 우리 영화배우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적어도 눈총을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저라도 주제의식을 담은 영화를 선택하게 된 거예요.”
→베테랑 토크②로 이어집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