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경,감독겸선수로…‘우생순’다시쓴다

입력 2008-07-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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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초대사령탑‘핸드볼인생2막’
“야, 차라리 감독이 던져라.” 6월2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두산의 경기. 삼성 선발투수 톰 션이 1회에만 5실점하자 3루 측 삼성 팬들이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전설적인 선수시절을 보낸 감독. 그의 과거에 대한 향수. 답답한 선동열 감독이 겉옷을 벗고, 불펜에서 몸을 푼다면 어떨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망상이 여자실업핸드볼에서는 현실이 된다. 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이 공식창단식을 가졌다. 초대감독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실제 주인공 임오경(37). 임 감독은 대한핸드볼협회에 선수등록까지 마쳤다. “인기 있는 팀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임오경을 만나 핸드볼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들었다. ○ ‘우생순을 넘어라.’ 임오경은 1994년, 한국체대 졸업과 동시에 일본 히로시마로 떠났다. 노정윤이 일본프로축구 히로시마 산프레체를 우승으로 이끌던 해였다. 2부리그에 있던 히로시마 이즈미(현 메이플 레즈)를 1년 만에 1부리그로 올려놓았고, 1996년 플레잉 감독 취임 첫 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4년간 7번의 우승을 안겼다. 노정윤 이후 히로시마발 한류의 주인공은 임오경의 차지였다. 기자단 선정 인기상, 히로시마 시민상이 증거. 고별경기에는 OB선수들과 취재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남부럽지 않은 대우도 받았다. 하지만 ‘임오경은 한국핸드볼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우생순’ 이후 임오경을 짓누르는 무게감은 더 커졌다. 임오경은 “핸드볼을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우생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반짝’했던 관심은 금세 잦아들었다. ‘비인기종목의 설움’이 상품화가 돼 광고에 등장하지만 관중석은 여전히 비어있다. “핸드볼의 (배고픈) 이미지가 미디어산업에는 잘 활용 됐지만 핸드볼의 자립에도 도움이 됐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관중’이라는 물질적인 토대가 없다면 ‘이미지’가 만들어 낸 측은지심조차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다. 일본보다 낮은 연봉. 일본에서 배드민턴 클럽을 하는 남편과 떨어져야 하는 어려움. 하지만 ‘영화 관객’이 아니라 ‘한국 핸드볼 관중’과 호흡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현해탄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 전용경기장이 있어야 임오경은 “‘핸드볼은 왜 항상 비인기종목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살아왔다”고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장과 경기시간. 4월2일, 임오경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수원삼성과 서울FC와의 경기에 앞서 시축을 했다. 오후8시에 경기를 한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국내 핸드볼 경기는 대개 평일 오후 시간대에 열린다. 수업 빼먹는 것이 마냥 즐거운 학생동원관중들에게만 좋은 일정. 전용경기장이 없다보니 이리저리 밀려 한적한 시간에만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퇴근시간 이후 경기를 해 가족단위 관중이 많다. 인기 팀 간의 경기는 4000여석 규모의 체육관에 표가 없어 못 들어갈 정도다. 핸드볼이 가진 박진감과 ‘우생순’이 만든 스타. 여기에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만 더해지면 “한국에서도 언제든 관중석을 채울 자신이 있다”고 했다. 임 감독은 “비인기종목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라면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핸드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넘어 체육인으로서 할 일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 “핸드볼출신 체육행정가가 있다면 결국 핸드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선수이전에 당당한 여성이 돼라 선수들도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당당함을 갖춰야 한다. 임 감독은 서울시청 선수들에게 “운동도 좋지만 20대에 할 수 있는 일은 꼭 해보라”고 강조한다. “그렇게까지 안했었어도 핸드볼은 잘 했을 텐데….” 30대 중반에 들어서니 숨 쉴 틈도 없이 달려왔던 자신의 모습에 후회가 남았다. 선수들의 뽀얀 피부가 망가질까봐 야외 훈련은 여간해서 시키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도 꼭 자외선 차단크림을 준비한다”고 했다. “결혼도 빨리 할 것이 아니라면 아예 늦게 하라”고 조언한다. 30대 여성들은 ‘우생순’에서 양육·가사까지 돌보면서도 출세한 커리어우먼을 발견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슈퍼맘’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임오경은 잘 알고 있었다. “20대 중반이면 코트를 떠나는 언니들을 보면서 안타까웠죠. 남들보다 2배의 노력을 했습니다. 체육인의 가치는 선수시절, 가장 큰 빛을 내니까요.” 임오경은 출산 이틀 전까지 경기에 나섰고, 출산 다음날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임오경의 포지션은 센터백. 농구로 치면 포인트가드다. 코트 안에서는 선수들의 리더이고, 밖에서는 역할모델이다. 이제 후배들은 임오경을 보며 30대 선수의 꿈을 키운다. “남들은 저에게 성공했다고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성공’이란 말은 남들이 저에게 덧입힌 것일 뿐입니다.” 더 큰 꿈을 향한 새로운 출발. 서울시청 감독으로 임오경 인생의 2막이 올랐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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