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영화같은야구인생’…“신인왕은내거야”

입력 2008-07-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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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승부만 있는 게 아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가 있고, 다큐멘터리보다 더 한 리얼리티가 있다. 그래서 팬들은 야구를 보면서 짙은 인생의 향기를 느낀다. 삼성 최형우(25). 28일까지 타율 0.272, 14홈런, 53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팀내 최다홈런과 최다타점을 올리며 삼성타선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다. 방출, 군입대, 재기, 강력한 신인왕 후보…. 그는 기막힌 성공 스토리를 써가고 있다. 입단 7년째인 올해 신인왕에 오른다면 역대 최고령 신인왕이 된다. 최형우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피우고 그 희망의 줄을 잡고 미래를 꿈꾸는 사나이다. 팬들은 그의 굴곡진 야구인생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드라마 같고, 한편으로는 만화 같은 삶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하고 절박하고 치열한 삶일 뿐이다. ○지독한 가난과의 싸움 최형우는 전주고 졸업반 때인 2002년 신인 2차지명 때 6라운드(전체 48번째)에 삼성의 지명을 받았다. 우투좌타의 포수였던 그는 당시 동국대 한대화 감독(현 삼성 수석코치)이 스카우트를 제의했지만 프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어요. 어머니는 농장에서 닭을 잡아 시장에 내다팔아 어렵게 저희 3형제를 키웠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죠. 밑에 남동생 둘이 있는데, 장남인 제가 대학가면 4년간 돈이 들어가잖아요. 계약금 5000만원, 연봉 2000만원을 받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죠.” ○마른하늘에 날벼락 입단 첫해. 2군에서 방망이를 좀 치자 1군에 호출됐다. 그러나 당시 김응룡 감독(현 삼성 사장)은 그를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4경기만 써보고 2군으로 보냈다. 5타석에서 2루타 2개를 뽑아냈고 어깨는 강했지만 미트질과 블로킹, 투수리드 등 포수로서는 기량미달이라고 판단했다. 2004년 2경기 2타석 무안타만 기록했을 뿐 기약없는 2군생활은 계속됐다. 그리고 2005년말, 방출통보가 날아들었다. “그해 2군에서 그래도 3할2푼 정도 쳤는데 방출은 생각도 못했어요. 나보다 못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그해 제 연봉은 입단할 때보다 100만원 오른 2100만원이었죠. 배운 거라곤 야구밖에 없고, 집에 돈도 없어 장사도 할 수 없고. 이제 뭐해 먹고 살아야하나 싶어 앞이 깜깜했어요.” 방출통보를 받은 날 밤, 입단동기인 조동찬 안지만 등이 술을 사 주며 위로해줬지만 술취한 그는 태어나서 처음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절망 속에서 피는 꽃 상무에 테스트를 받으러 갔지만 방출된 선수라서 그런지 탈락했다. 다시 한번 절망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때마침 그 때쯤 창단된 경찰청에 원서를 냈는데 창단팀이어서 그런지 합격통보를 받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인데, 마지막 기회인데, 여기서 잘하면 어디서든 나를 불러줄 팀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죠. 사실은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입단하자마자 당시 경찰청 김용철 감독님께 외야수로 전향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외야수비도 미숙한 나에게 감독님은 방망이를 살려주신다며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죠.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낮에 2군경기가 끝나면 혼자서 운동장을 달리고, 방망이를 휘둘렀고, 틈만 나면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오후 9시 점호가 끝나고 11시에 취침을 해야했지만 그는 매일 밤에 밖으로 나갔다. “정말 이를 악물었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방망이를 돌렸어요. 새벽 2시, 3시까지. 야구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여기서도 밀리면 내 인생은 끝난다는 생각뿐. 돈도 없어서 쉬는 날 친구들 만날 여유도 없었죠. 훈련하는 것밖에는….” 2006년 타율 0.344, 11홈런 44타점을 기록하더니 2007년 타율 0.391, 22홈런 76타점으로 2군 북부리그에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경찰청 첫해에는 다른 팀 2군 코치들이 그냥 안타까운 눈초리로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했는데 2년째에는 다른 팀 코치들이 한번씩 구단 사무실로 부르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지난해 중반쯤 삼성 스카우트팀 이성근 과장이 삼성 재입단에 대한 언질을 줬다. ○새는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사실 삼성에서 잘릴 때 처음에는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진로를 결정할 때쯤 생각해보니 대구에 정이 많이 들었더라고요. 동찬이나 지만이도 ‘다시 파이팅 해보자’고 용기를 줬고. 지금 생각해보니 방출은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이를 악물고 야구를 했고, 기량도 늘었으니까요. 프로세계는 냉정하잖아요. 그 무서움을 이젠 알죠. 언제 다시 방출될지 모르니 지금도 밤에 훈련을 해요.” 그는 올 시즌 단 한번도 2군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팀 타선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그는 “제 덩치에 더 쳐야죠. 목표치가 있는데 아직 안되니까 더 분발해야죠”라며 쑥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 목표치를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동안 어머니 건강검진 한번 해드리지 못했는데 올 겨울에는 그동안 고생하신 어머니 병원 한번 모시고 가는 게 꿈”이라고 했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나지 않고, 새는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소리 소문 없이 기량을 꽃피우고 있는 그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했다. 절벽에 서 봤기에 두려움이 없고, 절망을 이겨봤기에 더 큰 희망을 꿈꾸고 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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