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열한살울아들의겨울연가

입력 2009-02-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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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열한 살인 아들 석현이가 어느 날 잔뜩 삐쳐서 밥상 앞에 앉았습니다. 제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눈이 안 와서 속상해 죽겠어요” 하면서 정말 분하다는 듯이 식탁을 쾅 내리쳤습니다. 사실 이번 겨울은 다른 때에 비해 눈이 참 안 와서 제가 “조금만 기다려봐. 눈이 오겠지” 하고 위로를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뒤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들은 환호성을 지르더니 여자친구 정민이에게 전화를 걸어 집 앞 공원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 모습을 찍어주려고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제법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석현이랑 정민이랑 제법 크게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기에 저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정민이가 눈사람의 몸통 부분을 잡고 있고, 석현이가 낑낑거리며 눈사람 머리를 올려붙이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사진을 얼른 컴퓨터에 올리려고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는데, 세상에나 멀쩡했던 눈사람이 다 부서지고, 아들은 물에 빠진 생쥐꼴로 푹 젖어있는 겁니다. 거기다 정민이는 집에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석현이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는데, 쑥스러운 듯 금방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왜 무슨 일인데? 정민이랑 둘이 싸웠어? 아까까지 잘 놀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니까 석현이가 더듬더듬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정민이한테, 나중에 커서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했어. 그런데 정민이가 그게 누구냐고 물어봐서, ‘바로 너야!’ 했더니 정민이는 나랑 결혼할 생각 없대. 그리고 그냥 집에 가버렸어요”라고 했습니다. 석현이는 아직도 화가 났는지 남은 눈사람을 발로 마저 부수고 있었습니다. 열한 살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수줍은 고백을 여자친구에게 한 건데, 그 마음을 퇴짜 맞았으니 우리아들이 얼마나 창피하고 분했을지… 저는 제 휴대전화를 빌려주며 정민이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내보라고 했습니다. 한참동안 둘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더니 화해를 잘 했는지, 금세 마음이 풀려 우리 아들이 배시시 웃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실하게 마음을 풀어주려고, 아들이랑 같이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사람 만드는 게 생각보다 꽤 어려웠습니다. 옛날 어릴 땐 곧 잘 만들고 했는데, 이번엔 눈도 잘 안 뭉쳐지고, 조그만 뭉치에서 도무지 커질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조그맣게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하나만 만들려니 뭔가 서운해서 우리 식구 수대로 네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석현이가 또 눈을 뭉치는 겁니다. “그건 누구야?” 하니까 아무 대답 안 하는데, 아무래도 정민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저는 주방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냉동실에 검은 봉지로 싸 놨던 음식들이 죄다 식탁 위에 꺼내져 있는 겁니다. 얼른 냉동실 문을 열어봤더니 그 안에 눈사람 하나가 떡 하니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제 만들었던 정민이 눈사람 같은데, 녹는 게 안타까웠는지 석현이가 갖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석현이는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같이 살 거라고 하는데, 너무 소중하게 아껴서 제가 어쩌지 못 하고 지금도 냉동실에 넣어두고 같이 살고 있답니다. 이 눈사람과 언제까지 같이 살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여름까지 함께 살고 있다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 석현이의 순수한 사랑이 오래오래 계속 되어서, 좋은 추억들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서울 성동|김옥희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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