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음악가 오현명.
다시는들을수없으리우리들의영원한명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어둔 골목을 굽이굽이 지나 다다른 곳은 강남의 한 교회였다. 교인 수가 200~300명쯤 되어 보이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규모의 교회로 이날 무슨 절기를 맞아 특별 음악예배를 드린다고 했다.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에휴!) 성가대의 찬양이 이어졌다. 연신 입을 벌려가며 ‘따발총 하품’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곁 눈짓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어린 아이가 앉아 있기엔 지독히도 따분한 시간이었다.
온 몸을 비틀어 가며 버티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밑바닥을 보인다 싶을 무렵, 한 사람이 혼자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숱이 풍성한 머리는 희고 곱슬했다. 초청 강사인가 싶었다. ‘또 설교란 말인가’하고 좌절하고 있는데, 그는 목청을 돋워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느낌을 무어라 해야 할까. 잔잔하지만 힘 있는 그의 목소리는 예배당의 구석구석을 채웠다. 그 따뜻하면서도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한 온기란!
목사님이 그를 소개할 때 비로소 알았다. 성악가 오현명.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감격과 전율은 어제 일처럼 피부에 생생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되어 이 기사를 쓰고 있다. 이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손가락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24일, 성악가 오현명(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선생은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6일 정부는 고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오현명 선생을 말할 때 가곡 ‘명태’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세상에서 오직 한국사람 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애환, 해학과 재치가 가득한 노래 ‘명태’. 고인은 살아생전 숱한 가곡과 오페라의 아리아를 불렀지만(그는 한국 오페라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가장 사랑했던 곡은 역시 명태였다.
오현명이 곧 명태였고, 명태는 또한 오현명이었다.
‘검푸른 바다/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에지프트의 왕자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로 시작하는 명태의 하이라이트는 다음 부분이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노래 중 ‘쇠주를 마실 때’는 그냥 부르면 영 맛이 없다. ‘카아!’하는 추임새가 붙어야 비로소 명태가 완성된다. 쇠주맛을 알지 못하던 청소년 시절에조차 이 부분에선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명태의 인연에 대해 적어 놓았다. 한국전쟁 중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복무하던 시절, UN군 제7군단의 연락장교였던 변훈이 명태의 악보를 들고 왔다.
처음에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홍난파류의 서정적 가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절에 명태는 귀에 딱 들러붙는 멜로디도, 가사의 세련미도 없었다. ‘무슨 노래가 이래?’하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이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가사와 함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겹게 느껴지게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명태의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다. 평론가들의 지독한 혹평이 쏟아졌다. 작곡자 변훈은 아예 음악계를 떠나 외교관의 길로 가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명태의 매력을 알아챘고, 1964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대학생을 위한 음악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후는 탄탄대로. 명태가 한국 가곡사에 길이 빛나는 명품으로 거듭나기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인을 잃은 뒤 17평 아파트에서 홀로 지냈다. 암 투병을 하며 임종 직전까지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독창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바리톤과 베이스를 넘나들며 중후하면서도 더 없이 따스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성악가 오현명.
그가 없는 지금, 그 누가 있어 ‘오현명의 명태’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전설적인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라 해도 그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 사실이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