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GPS 먹통…가출 중년들 “갈 데까지 가보자”

입력 2010-03-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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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만화백 항해 스케치

《돛단배에게 바람은 적이면서 동시에 친구다. 사납고 거센 바람은 배를 뒤집고 급기야 삼켜버리기도 한다. 항해에 나서기 전 기압배치도, 풍향, 풍속을 면밀히 조사하는 일은 항해가의 목숨과 직결되는 중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추진력의 99%를 바람으로부터 얻어내는 돛단배는 바람이 없을 때 바람이 너무 강한 것만큼이나 괴롭다.

진해를 떠나 부산으로 향할 때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했고 바람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따분했다. 집단가출호에는 엔진이 달려있긴 하지만 항구를 들고날 때 잠깐 사용하는 것으로 파워가 극히 미약해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무풍의 바다를 지날 때 누군가 “우리 선원 중에 바람둥이가 없어서 이 지경”이라며 조크를 던졌다.잠시 후 제법 강력한 해풍이 불어와 우리 배는 돛 가득 바람을 품고 쏜살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누가 바람을 피운 것일까?》● GPS 먹통…가출 중년들 “갈 데까지 가보자”

“헉, GPS가 먹통이에요.”

차트 테이블에서 플로트를 조작하던 이진원 대원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난다. 플로트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GPS 신호 없음’이라는 경고 메시지만 깜빡거릴 뿐 현재 위치가 표시되질 않고 있다.

확인 결과 그동안 거친 파도에 배가 요동치며 금속 피로가 누적된 탓에 안테나 거치대의 용접 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부러질 때의 충격 때문에 민감한 전자칩들이 내장된 안테나가 망가진 듯했다.

배는 이미 진해만을 거의 다 빠져나와 가덕도 남단을 향하고 있는 중.

“이래서야 갈 수 있겠나?”

허영만 선장은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육분의를 써서 해와 별을 보고 항해하던 시절이라면 모르되 현대 항해에서 GPS는 없어서는 절대 안 될 너무도 중요한 장비다. 배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 그리고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GPS 덕분에 짙은 안개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항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석식 나침반과 해양조사원이 지원한 종이 해도,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용 GPS를 준비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게다가 해안선이 빤히 보여 위치 파악이 비교적 수월한 항로다. 허 선장은 계속 항해를 지시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배 뒤에 매달은 고무보트에 펑크가 발견 된 것이다.

독도까지 3000km의 장거리를 항해하는 집단가출호에게 고무보트는 배를 선착장에 직접 접안할 수 없는 경우 땅에 발을 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데 배 꽁무니에 묶여 지속적으로 특정 부위에 마찰이 가해져 기어이 구멍이 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1번 헤드세일은 강풍에 시달려 걸레처럼 너덜거린다. 한반도 일주 항해가 중반을 넘어서며 여기 저기 문제가 터지는 형국이다. 일단 오늘의 목적지인 부산 수영만으로 들어가 수리하기로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오전 내내 서쪽에서 5∼6노트로 불어오던 바람은 가덕도 등대를 스쳐갈 무렵 11노트의 남동풍으로 변했다. 2월 치고는 이례적으로 따뜻한 날씨에 지표면이 데워져 육상에 상승기류가 발생하자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바다에서 육지로 대기가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스핀 내리고, 제노아 올리자.”

허 선장의 지시에 대원들은 레이스라도 하듯 일사불란하게 돛을 교체했다. 허 선장은 언제부턴가 놀라울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스키퍼로 변신해있다. 8개월간 1700km에 걸친 야생 항해가 하루의 대부분을 화실의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국민 만화가를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바위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신뢰도 100%%의 선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특히 허 선장의 조타 기술은 집단가출호 구성원 중 단연 최고여서 까다로운 스피네커 세일링에서도 단 한번도 실수가 없었다.

거대 선박들이 분주히 오가는 마산 수로를 벗어난 뒤 올 겨울 들어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메뉴인 찐 고구마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워낸 만두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 후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해안을 바라본다. 배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 발원해 1300리를 달려온 낙동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다대포를 지나 태종대가 있는 영도를 돌아들고 있었다. 남해와 동해의 경계선을 넘어선 셈이었다.

거대 도시 부산의 해안 풍경은 그동안 지나온 곳들과는 사뭇 다르다. 컨테이너 부두의 대형 크레인,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들이 해안을 따라 줄 지어섰다.

오륙도를 끼고 돌자 광안대교가 펼쳐지고 수영만 앞에 십여 척의 딩기요트가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부산광역시요트협회 소속 선수들의 환영 퍼레이드다. 딩기들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나비처럼 출렁이는 바다를 가로질러 집단가출호를 둘러쌌다.

딩기의 안내를 받으며 수영만으로 진입하는 순간, 배가 스르르 멈춰 선다. 얕은 수심에 배가 걸려버린 것이다.

좌우 10m의 여유 밖에 없는 좁은 항 입구에서의 좌초는 우이도에서 겪은 대형 좌초 사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마침 썰물이 시작되고 있어 수심은 점점 낮아질 터였다. 다행히 부산협회의 모터보트 2대가 뒤에서 끌어당긴 끝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영만에는 2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왼쪽 출입구가 수심이 낮다는 것을 몰랐던 탓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부산광역시요트협회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우리는 GPS 안테나와 고무보트 수리에 매달렸다. GPS 고장 소식을 듣고 팀드레이크의 김승규 선장이 달려와 팔을 걷어붙였다.

엔진부터 전자장비까지 요트의 거의 모든 것을 직접 고치고 정비할 수 있는 ‘요트계의 맥가이버’ 김 선장의 등장은 이런 저런 고장으로 핀치에 몰린 집단가출호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 동해·서해·남해 경계 구분 어떻게?

동해, 서해, 남해의 경계는 어떻게 구분지을까? 바다에서는 주로 A지점과 B지점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으로 구획을 정하게 된다.

서해는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를 연결한 선으로 발해만과 구분되고, 남부의 동지나해와는 지형적 경계가 없으나 제주도와 양자강 하구를 연결하는 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남해는 진도 서쪽 끝과 제주도 서쪽 끝을 연결하는 선으로 서해와 나뉘며, 제주도 동쪽 끝과 일본 규슈의 고토오 열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동지나해와 이웃하며 대한해협으로 동해와 구분된다.

동해안은 두만강 하구에서 부산 송도에 이르는 직선 거리 809km, 실제 거리 1727km의 해안이다. 서해안은 압록강 하구에서 전남 해남에 이르는 해안으로, 직선 거리는 650km에 불과하지만 실제 거리는 무려 4719km에 달한다.

남해안은 동해안과 서해안의 사이, 즉 송도에서 해남까지의 해안이다. 부산에 도착한 집단가출호는 서해, 남해를 지나 바야흐로 동해에 진입한 것이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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