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간잽이 허영만 “식객은 아무나 그리나”

입력 2010-01-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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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도 바지선 위에서 조피볼락에 달인의 솜씨로 소금간을 하고 있는 허영만 선장. 소금간을 중시하는 허선장은 배낭에 항상 소금통을 지니고 다니며 직접 간을 맞춘다. (왼쪽 큰 사진) 물건항에서 욕지도로 향하는 뱃길에서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스타보드쪽 뱃전에 걸터앉은 한 대원의 뒤로 스포츠동아 사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날 바다는 비교적 잔잔했지만 한 겨울 칼바람은 뼛속까지 한기를 느끼게 만들었다.(오른쪽)

보석처럼 흩뿌려진 섬들…다도해 풍광은 추위도 잊게 한다욕지도 어부들이 던져준 볼락 몇마리 숯불 위에 올리고 소금 툭!툭!허선장의 무심한 듯한 손짓에 밴 연륜…생선구이, 이 보다 맛있을 수 없다!

우모 침낭, 우모 재킷, 우모 바지, 장갑, 털모자, 털양말, 목도리, 귀마개, 장화….

노트북 컴퓨터와 카메라를 아직 넣지 않았는데 항해용 카고백은 이미 빈틈없이 꽉 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아니, 내가 지금 남극으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뭔가를 빼야하지만 그렇다고 방한용품 중 한 가지라도 제외시킬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삼한사온을 잊은 채 폭설에 이어 벌써 10여일 가까이 이어지는 전국적인 혹한. 바다는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더 낮을 터였고, 게다가 파도에 옷이 젖게 되면 동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집단가출호의 2010년 새해 첫 항해이자 대한민국 바다 올레길 여덟 번째 구간 항해를 위해 1월 8일 새벽 6시 김포공항에 모인 대원들의 짐은 너나없이 평소보다 족히 두 배는 되어보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산하는 눈으로 보이는 저 끝까지 백설에 덮여있다. 매서운 한파를 몰고 온 대륙성 고기압 속의 시야는 문자 그대로 일망무제. 계룡산 상공을 지날 때 해가 떠올랐고 덕유산, 지리산에서 절정을 이룬 설경은 남해안이 가까워지면서 마치 칼로 끊어놓은 듯 사라졌다.

사천공항에 있는 한국우주항공(KAI)의 초청으로 항공기 생산 현장을 한 시간 가량 견학한 뒤 배가 정박한 남해 물건항으로 향하는 길에 삼천포어시장에 들러 앞으로 사흘간 식량이 되어줄 홍합과 굴을 샀다. 배에 올라 엔진을 켜자 ‘텅, 텅’하는 잡음이 들린다. 배터리, 냉각수, 연료 계통을 점검했으나 별 이상이 없다.

꼼꼼히 살핀 결과 엔진 냉각을 위해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해수 파이프가 얼어붙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바닷물은 염분 때문에 빙점이 낮지만 요즘 날이 워낙 추워 결빙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집단가출호의 모항인 경기도 안산시 탄도항은 최근 추위에 요트 정박장 주변 바닷물이 꽁꽁 얼어 빙판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추위가 계속되다가는 북서계절풍에 취약한 북서지방 요트들이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파이프 속의 얼음이 햇살에 저절로 녹았는지 다행히 엔진이 특별한 조치 없이 정상 가동돼 무사히 항을 빠져나와 세일을 올리고 욕지도를 향한 뱃길로 접어든다. 항을 빠져나오자 칼바람 추위가 뼈에 사무친다. 젖은 손을 금속 장비에 대면 쩍쩍 달라붙었다.

그러나 다도해의 아름다움은 추위마저 잊게 만들었다. 욕지도 부근은 다도해의 자연미를 압축시켜놓은 구간이다. 수온이 떨어져 한층 맑아진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섬은 지나치면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시리다. 오랜만에 스피네커 폴까지 장착한 러닝(뒤에서 부는 바람에 밀려가는 항해. 속도는 빠르지만 조종이 까다롭다)으로 네비게이션에 나타난 선속은 8∼9노트를 넘나들었다.

39개의 섬으로 이뤄진 욕지군도에 진입하자 일손이 빈 크루들은 마치 주말 여행객이라도 된 듯 사진 찍기에 바쁘고 절경에 반한 허영만 선장도 수첩과 펜을 꺼내 스케치에 몰두한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해안절벽, 갈매기, 해송, 그리고 섬 위에 외롭게 서있는 등대다.

멸치 떼가 지나가는 길목인지 가마우지들이 부지런히 자맥질을 해대고 있는 건너편으로 제법 큰 상괭이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요트를 따라온다. 긴장을 지나치게 풀어서였을까? 커다란 파도 하나를 넘어가며 위 아래로 요동치는 사이 배의 진행 방향이 바뀐다. 이어 뱃머리에 달아놓은 스피네커 세일이 터진 풍선처럼 바람이 빠진다 싶은 순간 꼬여버리고 말았다. 항해가들 사이의 은어로는 이른바 ‘모래시계’ 상황이다.

허영만화백 항해 스케치 이수도는 거제도 북동쪽 진해만 어귀의 작은 섬. 진해만 일대는 지금 대구가 제철이다. 대구는 역시 국물이다. 이 곳 주민들은 대구로 국물을 내어 떡국을 끓여먹기도 한다.요즘은 굴을 넣은 떡국도 좋지만 시원하고 깔끔하기는 대구 떡국이 한 수 위다. 이수도의 저녁. 침낭과 매트리스로 잠 잘 자리를 만드는 사이 대구잡이 호망어선 어선 한 척이 들어온다. 어부는 아마도 저 바다 멀리 어디선가에서 종일 고된 작업을 했을 것이다.배가 들어오자 갈매기들이 몰려와 난리 북새통을 이룬다.늙은 어부는 배를 묶은 뒤 곧바로 열마리 남짓한 대구를 다듬은 뒤 찌꺼기는 갈매기에게 던져준다. 갈매기들의 저녁 식사다.노을은 거제도 두모몽돌해 변 너머로 붉었다.


스피네커 세일의 가운데 부분이 꼬여 마치 모래시계의 형상이 되는 것으로 바람이 셀 경우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찢어져 돛을 잃는 것은 물론 브로칭(돛에 걸린 비정상적인 풍압에 의해 배가 고꾸라지는 것)까지 당할 수 있다.

대원들이 뱃머리로 달려가 세일에 걸린 압력을 줄이고 있는 사이 허영만 선장이 배의 방향을 절묘하게 틀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지난 달 소리도에서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긴 뒤 크루들 사이에 위기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노하우가 생겨났다.

집단가출호 대원들은 한반도 일주 항해 개시 전 요트라고는 사진으로 밖에 못 본 사람이 50%%에 달하는 오합지졸이었으나 계속되는 실전에 시나브로 경험이 쌓여 어느덧 뱃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즐비한 섬들 사이로 남동진하다 노대리를 오른쪽으로 끼고 남쪽으로 돌자 그동안 부속섬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욕지도가 겨울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을 받고 떠있다. 해도상에 암초가 드문드문 표시되어 있는 수로를 타고 마을로 귀환하는 어선들과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욕지항에 입항했다. 풍경에 맘을 빼앗겨 항해 중 아무도 식사를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에 욕지도에 상륙하자마자 식당부터 찾았다.

남쪽바다 섬마을 선창의 백반은 걸고 푸짐했다. 그렇잖아도 굶주린 크루들은 밥이 나오기도 전에 감태무침, 미역무침을 게 눈 감추듯 비웠다. 뜨거운 밥에 겨울이 깊어 알맞게 익은 김장 김치와 몇 가지 젓갈, 그리고 무를 썰어 깔고 조려낸 제철 고등어가 남도의 소박하고 풍요로운 밥상을 장식했다.

겨울밤은 길어 군것질 거리가 필요했다. 나무로 만든 낡은 바지선 위에 야영캠프를 차리고 숯불을 피워 삼천포 시장에서 사온 홍합과 굴을 석쇠에 얹어 구웠다. “만화 그리는 분 맞지요? 숯불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거 한번 꾸워 먹어 보이소.” 허 선장을 알아본 건너편 배의 어부들이 조피볼락 몇 마리를 던져준다.

허 선장은 집단가출호 최고의 간잽이다. 배낭에 항상 신안염전에서 생산된 굵은 소금이 든 통을 갖고 다니다 소금구이를 할 땐 손수 소금 간을 하곤 한다. 대충 뿌리는 것 같아도 절묘하게 간을 맞춰 대원들 사이에 인기 최고다. 이날 얻은 조피볼락도 허 선장의 소금 간을 받아 구워지는 즉시 사라졌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 속에서 숯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석쇠 위에서는 굴, 홍합이 지글지글 끓는 가운데 욕지도의 겨울밤은 깊어갔다. 자정이 넘어 멀리 나가는 멸치 배 몇 척이 갈매기 떼를 꽁무니에 달고 혹한의 바다로 떠났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사진=김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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