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에 50여m 가까이 근접해 항해중인 집단가출호. 일반적으로 배가 섬에 바싹 붙으면 암초에 걸릴 위험이 크다. 그러나 매물도의 치명적 아름다움은 자꾸만, 자꾸만 배를 섬쪽으로 끌어당겼다. 스포츠동아DB
상록수로 덮힌 섬들은 초록으로 눈부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별이 이럴까
눈요기로만 끝내기 아쉬운 풍경
허화백의 스케치는 멈출 줄 모른다
“그래 자모 안 춥습니꺼? 내 같으면 바∼로 얼어 죽지 싶은데?”
8차 항해 이튿날인 1월 9일, 경남 통영 욕지도의 아침. 눈을 떠보니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 신세가 되어있었다. 대원들이 비박 중이던 바지선 주위로 동네 주민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휴대전화로 연신 우리 모습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기야 이 혹한에 매트리스와 침낭만으로 바닷가에서 노숙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신기할 법도 하다.
집단가출호 대원들은 지난해 6월 한반도 바닷길 일주 항해를 시작한 이후 줄곧 비박을 해왔다. 바다를 좀 더 가깝게, 직접적으로 느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비박은 11월까지는 낭만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안쓰러운 시선이 많아졌다.
간 밤에는 경기도 김문수 지사측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었다.
“서해 탄도항은 바다가 얼어서 요트들이 애를 먹고 있어요. 쇄빙선이 있어야한다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쪽은 괜찮습니까?”
보트-요트 관련 전국 최대 이벤트인 ‘경기도 국제보트쇼’를 홍보하기 위해 집단가출호의 전국 일주 항해를 지원하고 있는 경기도 입장에서도 이 추위 속에 항해하고 있는 우리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면 비박은 그다지 춥지 않다. 다만 숨을 쉬기 위해 침낭 사이로 내 놓은 코가 좀 시릴 뿐.
허영만화백 항해스케치
배 안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다.갤리(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배 안에 마련된 부엌)에는 그네의 원리를 이용해 배가 흔들려도 항상 수평을 유지하도록 고안된 가스 스토브가 설치되어있지만 그것은 약한 파도일 때나 사용 가능하다. 대개는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냄비가 엎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 식사당번의 주요 임무 중 하나. 잠깐 방심하는 틈에 배가 기울어 다 된 요리를 쏟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식사당번 송영복 대원은 첫 작품 삶은 고구마가 인기리에 매진되자 이어 삶은 감자를 냈는데 그것도 히트였다. 대원들의 호응에 용기백배해진 송대원은 삶은계란에 심지어 군만두까지 줄줄이 만들어냈다. 결국 메인 메뉴인 홍합떡국 굴떡국이 나왔을 땐 배가 불러 얼마 먹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게다가 여기는 남녘. 서울, 경기의 매서운 추위에 비하면 봄날이다. 그래도 춥긴 추운지 출항 준비를 하는데 배의 갑판이 온통 얼음투성이고, 배를 묶어놓았던 줄도 꽁꽁 얼어있었다.
집단가출호는 겨울 아침 햇살을 뚫고 욕지항을 빠져나와 북서풍을 왼쪽으로 받으며 시속 8노트로 거제도 남쪽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욕지도, 다가오는 매물도를 바라보며 이 바다가 왜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됐는지를 실감한다.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해안선도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 같지만 별처럼 많은 섬들 하나하나가 모두 보석이다. 해송, 동백 등 상록수가 많은 섬들은 남해의 푸른 물결 위에서 초록으로 빛나, 마치 우주에서 지구별을 바라보는 듯 애틋하다.
해외 요트 관련 잡지나 인터넷 사이트의 사진을 통해 지중해, 뉴질랜드, 호주 등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다를 많이 보았으나 한국의 남해처럼 고즈넉하게 빛나는 곳은 보지 못했다.
한반도 일주 항해를 한다지만 사실 이 수많은 보석들 중에 정박해 직접 발로 밟아볼 수 있는 곳은 극히 미미한 일부일 뿐이다. 1년 50여일의 항해로 영해의 외곽을 빙 돌아 독도까지 가야하는 일정도 빡빡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작고 예쁜 섬들엔 요트가 머물 수 있는 접안시설이 없는 탓이다.
아름다운 섬들을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에 스케치 수첩 위에서 허영만 선장의 펜이 바쁘다.
지난 몇 달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던 끄심바리 낚시가 수온이 낮아져서인지 이번 항해들어 전혀 성과가 없다. 그저 배 뒤에 매달고만 가도 고기가 잡히던 기특한 낚시였는데.
잘 잡힐 때는 원래 이 정도 잡히는 것이려니 생각했으나 막상 생선이 조달되지 않자 간식거리가 아쉽다.
항상 먹던 생선회 간식 대신 달기로 전국에서 이름난 욕지도 고구마를 삶았다. 바다 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먹는 고구마는 맛도 좋았지만 빨갛게 언 손을 녹이는데도 그만이었다.
잠시 뒤엔 인스턴트 만두로 만든 따끈한 군만두가 갑판으로 배달됐다. 배 위에서 군만두라니. 부지런한 식사당번 덕분에 입의 호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사이 배는 매물도 남쪽을 바짝 붙어 지난다. 해벽등반지로도 유명한 매물도는 푸른 겨울 바다와 더불어 자체 발광했다. 매물도의 흰 등대가 가물가물해질 즈음 식사당번이 선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점심 식사를 주문하라고 고함을 친다.
2010년 첫 항해를 앞두고 허영만 선장을 비롯한 집단가출호 선원들이 서로에게 큰절을 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선택은 홍합 떡국, 혹은 굴 떡국.
그러나 간식으로 배를 불린데다 외도 부근의 경치에 넋을 빼앗긴 대원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식사당번은 언제까지 선실에만 있지는 않겠다며 볼멘 소리를 한다.
보다 못한 허영만 선장이 일괄적으로 주문을 받아 선실로 전달했다.
“홍삼굴칠”.
홍합떡국 3인분에, 굴떡국 7인분이란 뜻이다.
지세포를 2마일 여 앞두고 있을 즈음 바다 위로 한 무리의 윈드서퍼들이 수면을 가르며 우릴 향해 다가온다. 전국체전, 소년체전의 윈드서핑경기에서 전국 최강의 전력을 보이고 있는 지세포 서퍼들이 집단가출호를 위해 환영 서핑 퍼레이드를 마련한 것이다.
항해가 여덟 달째에 접어들면서 세일링에 관심있는 단체나 동호인들에게 집단가출호의 동선이 알려져 있는 덕분에 이런 뜻밖의 가슴 따뜻한 환영을 받곤 한다.
지세포요트스쿨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있는 사이 진해해양레포츠스쿨에서 나온 요트 한 대가 도착했다. 이 요트는 진해까지의 뱃길 안내를 위해 아침 일찍 진해를 출발해 우리와 해상 랑데부한 것이었다.
거대한 LNG선과 유조선이 묘박되어있는 거제도 북동쪽 해안을 따라 옥포, 장승포를 거쳐 이수도 선착장에 배를 댄 것은 오후 6시였다.
1월 10일 아침은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구름이 낮게 깔려있고 북풍이 세차다. 바다는 사방이 온통 어구. 자칫하면 킬에 어구 줄이 감겨 오도 가도 못할 위험이 다분한 해역이다. 스쿨측이 요트를 보내 수로를 안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맞바람을 뚫고 공사 중인 거가대교(거제도와 부산 가덕도를 잇는 다리) 교각을 통과하는데만 20여 차례의 태킹(돛을 움직여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범선을 돌리는 일)을 해야 했다.
통발 위치를 표시한 부표들이 지뢰처럼 깔려 운항이 가능한 수로는 몹시 좁았다. 만일 일몰 후에 수로 안내선 없이 이런 곳을 지난다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수도 없는 태킹에 신물이 날 지경이 됐을 때에야 배는 진해해양레포츠스쿨의 부잔교에 도착했다. 레포츠스쿨과 진해시청 관계자들이 ‘허영만 화백의 집단가출호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배에서 내린 허영만 선장의 목에 화환까지 걸어준다.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환영 방식. 그러나 그 마음이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항해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과 단체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사진=김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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