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치르기 위해 포트 엘리자베스로 떠난 후, 루스텐버그에는 잉글랜드가 홀로 남아 첫 상대인 미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잉글랜드 숙소와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는 바포켕 스포츠 캠퍼스에 들어가려면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야 하는데, 먼저 현지 경찰이 출입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경비원에게 인계하면 무전 연락을 받은 대표팀 관계자가 기자를 내부로 안내하는 식이다.
남아공에서 처음 느꼈던 건, 이곳 사람들이 아주 느긋하다는 사실이다. 교통, 편의시설, 숙박 등 뭐든지 예약을 해도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는 건 보통이기 때문에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선 미리미리 서둘러야 한다.
간신히 도착한 기자회견장에는 잉글랜드의 신임 주장 스티븐 제라드가 나왔다. 리버풀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모습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잉글랜드 선수들이 공식 행사에서 착용하는 파란색 폴로 티셔츠가 어색해 보였지만 특유의 찡그린 듯한 표정은 여전했다.
제라드는 리오 퍼디낸드가 최근 훈련 도중 부상당하는 바람에 완장을 이어받게 됐지만 클럽에서 이미 오랫동안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됐다고 해서 어색할 건 없었다. 영국 언론의 질문은 프랭크 램퍼드와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는 데 어려움은 없느냐, 미국 선수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게 될 텐데 어떡하냐 등이었는데, 제라드의 대답은 한결같이 “축구는 팀플레이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사실 잉글랜드에서 팀플레이는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다. 23명의 선수들 중 소위 ‘빅4’ 클럽에 소속된 선수들이 9명이고, 여기에 지난 시즌 4위를 차지한 토트넘 선수들을 더하면 14명이다.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선수들을 한 데 뭉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영국 에디터들 중 무려 세 명이 에버턴 팬이다. 다행히(?)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에버턴 선수는 한 명도 없지만, 그들은 철천지원수 리버풀의 상징인 제라드가 완장을 차게 된 순간부터 대표팀에 정을 뗐다고 했다. 잉글랜드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것보다 에버턴이 (FA컵도 아닌) 리그컵에서 우승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제라드가 대표팀을 이끌고 8강 문턱을 넘어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차전 미국전 무승부도 불안한 예감을 들게 한다. 어쩌면 지금 잉글랜드에 필요한 건 5년 전 이스탄불에서 제라드가 리버풀을 유럽 정상으로 이끌었을 때 보여줬던 신들린 듯한 리더십과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FIFA.COM 에디터
2002 월드컵 때 서울월드컵 경기장 관중안내를 맡으면서 시작된 축구와의 인연. 이후 인터넷에서 축구기사를 쓰며 축구를 종교처럼 믿고 있다.국제축구의 흐름을 꿰뚫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