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진통제 주사 투혼 박철순…우승 뒤 코피 쏟은 최동원

입력 2012-10-06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올드 팬들은 현대야구에서 투혼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 한다. 한국프로야구는 원년부터 부상 투혼을 양분으로 싹을 띄웠다. 박철순은 자신의 몸과 OB의 우승을 맞바꿨고, 그 때문에 한동안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스포츠동아DB

한국시리즈 30년…가을야구의 추억


야구생명 걸고…1·3·5·6·7차전 등판
1984년 김시진도 부상 불구 오기 완투



김선진·박철우는 끝내기로 일약 영웅
채병용, 통증 안고 던진 7차전 못잊어


야구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인간의 번뇌를 상징하듯 108개의 실밥을 가진 야구공이 18.44m 거리의 투수판에서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야구는 모든 이에게 다른 의미를 준다. 1982년 10월 5일 OB-삼성의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시작해 2011년 10월 31일 삼성-SK의 한국시리즈 5차전까지 수많은 가을야구가 펼쳐졌다. 아직도 팬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명장면도 많지만 팬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장면도 있다. 과연 그들에게 가을야구는 어떤 의미였을까.


○박철순-최동원-박정현-염종석-채병용의 희생

1982년 10월 8일 프로원년 한국시리즈 3차전. 삼성에 1무1패로 뒤진 OB. 에이스 박철순이 관건이었다. 9월 22일 삼성전에서 허리부상을 당한 뒤 버텨왔지만 쓰러졌다. 1·2차전 때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박철순은 결심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기로.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첫 우승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동대문구장 라커룸. 김영덕 감독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오늘 철순이가 야구생명을 걸었다.” 그 뒤 OB는 기적 같은 4연승을 따냈다. 3·4차전 세이브에 이어 6차전 완투승을 거둔 박철순은 첫 우승의 영광 속에 기나긴 부상치료와 재활 등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감내해야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 존재한다.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시리즈였다. 1·3·5·6차전 등판에 이어 7차전 완투. 전설로 남은 불꽃피칭. 너무 힘들어 시상식 때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 위에서도 연신 어깨를 만졌다. 우승 축하파티를 앞두고 쌍코피를 쏟았다. 휴지로 코피를 틀어막고 축하케이크 앞에서 섰던 최동원이다.

1989년 태평양이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나갔다. 10월 8일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박정현은 14이닝을 완투하며 3-0 승리를 안겼다. 그해 신인 최다승 달성을 위해 무리를 해왔다. 190cm가 넘는 큰 키가 더욱 부담이 되는 잠수함투수. 11일 3차전 삼성에 역전의 기회가 왔다. 박정현은 4회 또 마운드에 올랐다. 9회 투아웃까지 혼을 쏟았다. 단 1안타만 맞았다. 통증을 참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주저앉았다. 구급차를 타고 그라운드를 나섰다. 그해 태평양의 가을은 박정현 야구인생의 큰 훈장이었지만 이후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1992년 포스트시즌은 19세 루키 염종석의 무대였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완봉승,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2승1패. 공은 언터처블이었다. 10월 12일 빙그레 정민철과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고졸투수 선발대결을 앞두고 탈이 났다. 경기 전날 어머니가 힘을 내라고 끓여준 장어탕을 먹고 배탈이 났다.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설사를 했지만, 마운드를 포기하지 않았다. 1992년 롯데의 우승은 염종석의 오른팔 인대와 바꾼 것이다.

2009년 SK 채병용도 같았다. 수술을 앞두고 너덜너덜해진 팔꿈치 인대로 던졌다. 공 하나를 뿌릴 때마다 찌릿한 자극이 온몸을 감쌌다. 진통제로도 막지 못하는 통증. 7차전 9회말 KIA 나지완에게 한국시리즈 끝내기홈런을 맞고 눈물을 흘렸지만 팬들은 그 피칭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둔 투수는 여전히 1984년 롯데의 최동원 뿐이다. 스포츠동아DB




○김시진-김홍집-이정훈의 자존심

1984년 한국시리즈. 삼성 김시진은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최동원과 붙었다. 시리즈 전 김영덕 감독이 등판순서를 타진했다. 그는 말했다. “동원이가 1,3,5,7로 나오죠. 나도 그렇게 갈께요.” 1차전 패배. 3차전에서 설욕을 다짐했지만 2-2이던 8회 홍문종의 타구에 왼 발목을 맞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어지간했으면 포기했겠지만 6차전에 또 등판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서 마운드에 섰다. 라이벌에 질 수 없다는 오기의 완투였다. 승패 문제가 아니었다.

1994년 태평양 김홍집. 한국시리즈 개막전. LG 이상훈과 선발대결을 했다. 대학시절부터 최고 왼손투수 자리를 놓고 다퉈오던 두 사람. “너보다는 오래 던진다”며 마운드에 섰다. 연장 11회 141구째 슬라이더가 김선진의 배트에 걸리며 울었다. 4차전 김홍집은 인천구장 마운드에 또 섰다. 팀은 3연패의 벼랑 끝이었다. 선발대결을 고집했으나 코칭스태프가 만류했다. 결국 4회 등판해 5.1이닝을 던졌다. 이상훈보다는 오래 마운드를 지켰다.

1994년 한화 이정훈. 시즌 도중 강병철 감독의 입을 통한 트레이드 설에 자존심이 상했다. 해태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5회 동점 2루타를 쳤다. 스윙도 제대로 못하는 장종훈을 거르고 자신을 상대한 해태 마운드를 상대로 안타를 쳤다. 3안타 2타점을 몰아친 이정훈은 이렇게 말했다. “화끈하게 하고 내 발로 팀을 떠난다”고. 1987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8년간 주전타자로 활약했던 그의 프라이드가 만든 안타였다.

SK 채병용(왼쪽)은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팔꿈치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도 마운드에 섰다. 비록 KIA 나지완에게 끝내기홈런을 허용했지만, 그의 투혼은 큰 박수를 받았다. 동아일보DB




○김선진-박철우-김태완-송유석에겐 인생 한번의 기회

1993 삼성-해태 한국시리리즈 3차전. 3회부터 나와 연장 10회를 마친 선동열이 스파이크를 벗었다. 어깨 부담으로 더 못 던지겠다고 했다. 상대 박충식의 공은 무시무시했다. 삼성 선수들과 팬들이 모두 선동열의 자진강판을 바라봤다. 그 순간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송유석. 기대하지 않았던 배팅볼 투수 출신. 마당쇠란 별명처럼 집안의 힘든 일이 생기면 도맡아 처리하던 그의 공은 삼성 선수들과 팬의 기대를 저버렸다. 5이닝동안 삼성 타선을 무안타로 막아내며 결국 무승부. 해태의 1993시리즈 우승은 송유석의 피칭이 분수령이었다.

1994 태평양-LG 한국시리즈 1차전. 6회 대주자로 들어 김선진. 빠른 발 빼고는 이렇다할 장점이 없던 선수, 1993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결정적인 주루실수도 했다. 시즌 뒤 방출대상 명단에 올랐던 타자는 연장 11회 기회를 잡았다. 초구. 한국시리즈 첫 연장 끝내기 홈런. 그 한방으로 김선진의 야구인생은 제 2막으로 이어졌다.

1996년 쌍방울 박철우도 그랬다. 1989년 해태시절 한국시리즈 MVP도 올랐지만 1996년에는 퇴물선수였다. 시즌 동안 고작 43타석에 나와 6안타를 쳤다. 현대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9회 대타로 나온 그는 끝내기홈런을 뽑아내 영웅이 됐다. 1991년 빙그레-해태 한국시리즈 4차전. 시즌 내내 대주자로 나왔던 김태완은 연고지 빙그레에서 받아주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은 선수. 시즌 5안타를 쳤지만 이날 한용덕을 상대로 2타점 동점타를 쳤고 결승득점까지 하며 야구인생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