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국 에세이] 밴쿠버 ‘올해의 선수’ 이영표를 회상하며

입력 2012-10-29 15:37:04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밴쿠버 이영표. 동아일보DB

이영표가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는 소식에 그와 함께 보낸 지난 12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11년 남짓한 스포츠기자 생활을 접고 막 시작한 스포츠매니지먼트 사업의 첫 고객. 거스 히딩크 감독의 PSV 아인트호벤 시절 함께 꾸었던 유럽정벌의 꿈. 런던의 한인타운 뉴몰든에서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토트넘까지 비빔밥을 공수해 먹고선 데뷔전 MVP가 됐던 일, 도르트문트를 거쳐 사우디에 입성하며 나눴던 진지한 얘기들. 화이트캡스 서포터들이 선사한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이제 선수생활을 정리해야할 시점에 와있는 이영표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에이전트로서 ‘행복했다’는 한마디다. 사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인간만큼 복잡한 동물은 없기 때문이다. 선하다 싶다가도 어느새 악한 모습으로 돌변하고, 포기하고 싶도록 지치게 하다가도 난데없이 희망을 던져주는 그런 게 인간이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비즈니스’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 일을 하는 내내 절감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영표는 예외였다. 물론 그와의 12년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초롱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이영표는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다. 그를 인터뷰하던 이금희 아나운서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말솜씨도 똑 부러진다. 축구선수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명철한 사리판단과 분석능력, 여기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마저 갖춰 가끔은 ‘어떻게 선수가 저런 말을…’이라는 탄성마저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축구선수가 말을 너무 잘하는 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언행일치가 어려워지고, 자칫 이중적이라는 인상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영표는 완벽하진 않지만 무결점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청교도적인 태도를 지닌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선수가 너무 잘나도 에이전트는 피곤하다. 특히 이영표처럼 매사에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조그만 불의라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푸근한 인상을 주기 어렵다. 사람이 완벽하면 상대방을 긴장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퍼즐이 꼭 맞아야만 OK 사인을 보내는 성격이다. 대충 넘어가다가는 틀림없이 허점을 지적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내가 이영표와의 인연을 ‘행복하다’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이유는 선수로서 그만큼 에이전트를 편하게 해준 고객은 없었기 때문이다. 에이전트에게 가장 피곤한 고객은,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경기력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다. 선수는 기량에 따라 경기에 나갈 수도, 못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아닌 ‘남’이나 ‘다른 것’에서 핑계를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나보다 쟤가 낫다는 게 이해가 안돼’ ‘감독의 선수기용을 이해할 수 없다’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경기를 망쳤다’ 등등 사사건건 남 탓을 하는 선수치고 성공한 경우는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이영표는 그와 정반대다. 그도 잉글랜드 토트넘과 도르트문트 시절 장기간 경기에 결장하는 고통의 순간이 있었지만 ‘선수가 경기에 뛰지 못하는 것은 100% 선수 책임’이라며 나의 걱정을 한마디를 일축하곤 했었다. 이처럼 일관된 그의 프로정신이 35세의 새내기 이영표를 화이트캡스의 ‘올해의 선수’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우리 고객 가운데 유일하게 나를 형이라 부른다. 숱한 고난과 인내의 시간들을 함께 이겨냈기에 15년의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하고 어느새 ‘동지’와 같은 관계가 됐기 때문이다. ‘올해의 선수가 됐으니 한 10년은 더 뛰어야겠다’고 농담하는 그에게 나는 ‘어쩌면 올해가 은퇴의 적기일 것 같다‘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른다. 늘 그래왔듯 최후의 순간에 그가 의지하는 것은 나의 조언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그분‘의 결정이기에.

(주)지쎈 사장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