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마니아리포프
“아직도 설레서 밤에 잠 안 와” 우승 여운
한때 골프 계속해야 하나 슬럼프 겪기도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할 일은 골프뿐”
이제 대회 출전 위해 짐 싸는 일도 즐거워
“한동안 골프가 지겨웠는데 이제는 즐거워졌다. 필드에 있는 게 행복하다.”
1일 태국 촌부리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혼다 타일랜드에서 1년 5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한 양희영(26·사진). LPGA 투어 시즌 5번째 대회인 HSBC 위민스 챔피언스(총상금 140만 달러)가 열리는 싱가포르 센토사 골프장에서 5일 그녀를 다시 만났다.
● “아직도 실감 안나”
연습 그린에서 양희영과 마주했다. 이날 날씨는 섭씨 31도까지 올라가는 폭염 수준이었다. 습도까지 높아 잠시만 밖에 있어도 금세 땀으로 온 몸이 흥건하게 젖었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양희영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땀을 팔뚝으로 닦아내더니 “태국보다 더 더운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난다”며 힘들어했다. 그러나 얼굴에선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승 덕분인지 표정이 무척 밝았다. 양희영은 ‘오랜만에 우승한 기분이 어떤가’는 질문에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난다. 우승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며 멋쩍어했다.
양희영의 우승은 골프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우승 경쟁을 펼친 상대는 세계랭킹 3위인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였다. 게다가 마지막 날 짜릿한 역전승을 거둬 더 극적이었다.
1일 최종 4라운드 경기를 TV를 통해 지켜보던 팬들조차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 있었다. 14번홀(파4)이었다. 2타차 단독선두를 달리던 양희영은 보기를 범하고 말았다. 2위 루이스는 버디를 잡아 순식간에 공동선두가 됐다. 양희영은 “그 순간에는 정말 많이 긴장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양희영의 손을 들어줬다. 다음 홀에서 루이스가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양희영은 “루이스가 그 홀에서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 바람에 조금 더 쉽게 우승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고 밝혔다.
우승 후 4일이 지났지만, 여운은 채 가시지 않았다. 양희영은 “마음이 설레서 그런지 아직도 밤에는 잠이 잘 안 온다. 우승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며 수줍게 웃었다.
● “짐 싸는 일부터 즐거워요”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양희영은 갑자기 골프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골프를 계속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생겼고, 그러면서 조금씩 골프와 멀어지고 있었다. 양희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다. 그동안 오로지 골프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만으로 달려왔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심경의 변화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10년여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양희영은 골프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작정 쉬기만 했다. 시즌이 남아있었지만 일찍 끝냈다. 골프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양희영은 “10년 넘게 골프를 해왔는데, 어느 순간 ‘골프를 계속해야 하나. 언제까지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골프에 대한 흥미와 집중력이 떨어졌고, 골프장에 가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며 힘들었던 시간을 돌아봤다.
그때만큼은 골프가 정말 싫었다. 투어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다음 대회 장소로 옮기는 일을 1년 내내 반복한다. 짐을 싸고 풀고 다시 짐을 싸서 이동하는 스케줄이 반복된다. 양희영에게는 그런 반복적 일상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대회를 끝내고 집으로 오면 다시 짐을 싸서 다음 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라고 묻게 됐다. 정말 모든 게 귀찮을 정도였다.”
골프채를 내려놓은지 몇 개월 후 양희영은 스스로 다시 골프채를 들었다. 그리고 필드로 돌아왔다. 그녀는 “쉬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다시 골프가 하고 싶어지더라.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골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시 골프채를 든 이유를 설명했다.
희한하게 그 순간부터 골프가 더 즐거워졌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열심히 땀을 흘렸다. 양희영은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니까, 더 재미있고 잘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양희영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전에 없던 자신감을 보였다. 가족 앞에서 “올해는 감이 다르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며 잘 드러내지 않던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다. 그리고 시즌 개막 한 달 만에 우승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렸다. 양희영은 “골프가 더 즐거워졌다. 필드에 있을 때가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싱가포르|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na1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