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민병헌의 공 투척 사건이 있었던 그 날, 마산 NC전에서 1-7로 뒤진 9회초 마지막 공격을 지켜보는 두산 덕아웃의 표정이 심각하다. 이들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스포츠동아DB
투수가 투구할때까지 아무일 없지만
타자·야수·덕아웃 수많은 생각 교차
팬들은 선수의 플레이에 열광하지만
정적인 순간의 준비가 ‘승부의 열쇠’
장채근 홍익대 감독은 KBO리그 최초의 기록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밀어내기 사구로 결승타점을 올렸다. 1986년 삼성-해태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었다. 3차전에서 홈팀 삼성이 5-6으로 진 것에 화가 났던 몇몇 극성팬들이 대구구장 부근에 주차된 해태 선수단의 버스를 불태운, 그 유명한 방화사건 다음날 벌어진 경기였다. 당시 KBO는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경기를 중립지역에서 치르거나 연기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팬과의 약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예정대로 대구에서 4차전을 열었다. 전투경찰이 투입돼 스탠드를 지킨 가운데 펼쳐진 경기는 연장 11회에야 끝났다. 해태가 7-4로 이겼다. 4-4로 맞선 연장 11회초 2사 만루서 대타 장채근이 삼성 5번째 투수 진동한에게서 밀어내기 사구를 얻었다. 장채근은 뒷날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진동한의 공이 몸쪽으로 날아오는데 눈을 딱 감고 버티면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맞겠다고 결심했는데, 공이 날아오는 순간이 너무 길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잘못 맞아서 선수생활이 끝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야구인생이 그 짧은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고 말했다.
투수와 포수간의 거리는 18.44m다. 시속 140km대의 투수가 공을 던지면 0.45초 이내로 포수 미트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야구상식이다. 진동한의 공은 이보다 더 느리다고 봤을 때, 장채근은 0.5초의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인간의 뇌는 무궁무진한 능력을 지녔다. 장채근의 기억은 야구와 생각에 대해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 야구는 정중동의 경기다!
표면적으로 보면 야구는 지루하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야구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배 나온 사람이 하는 운동”, “선수가 한 번도 달리지 않고, 땀도 나지 않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구의 매력은 바로 이 움직임이 없는 곳에서 나온다. 야구는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루면서 매일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투수가 던진 무시무시한 공을 상대하는 타자의 기량, 공을 잡으려는 야수의 동물적 움직임, 야수들을 뚫고 굴러가거나 날아가는 공이 큰 환호성을 만들지만, 정적인 순간도 빼놓을 수 없는 흥미 요소다.
SK 조 알바레스 코치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까지의 시간(대략 10∼12초 정도로 본다)에 양 팀 엔트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생각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고 했다. 참고로 5월 31일까지 벌어졌던 KBO리그의 평균 경기시간은 3시간20분이었다. 경기에서 나온 총 투구수는 7만9031개였다. 경기당 평균 투구수로는 312.4개다. 피칭 사이 ‘생각의 시간’을 10초로만 잡아도 경기당 3124초(52분)를 차지한다.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공수교대, 투수교체, 그라운드 정리 등을 제외하면 선수들이 움직이는 플레이시간과 비교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호수 위의 백조는 우아하게 떠있는 듯 보이지만, 물밑에서 열심히 발질을 한다. 그것이 야구에서의 생각이고, 정중동이다.
● 생각의 시간, 그라운드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많은 사람들이 예측을 한다. 야수는 득점상황, 볼카운트, 타자의 스윙궤적과 컨디션, 경기 전 분석팀에서 건네준 상대 선수에 대한 데이터 자료, 우리 투수의 컨디션과 구위 등을 고려해 어떻게 할지 예상하고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요즘 야구의 유행인 시프트다. 선수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일수록 상대에 대한 예측 확률은 높아진다. 팬들은 야수의 마지막 동작에 환호하고 기뻐하지만, 덕아웃의 감독과 코치들은 야수의 첫 발걸음을 보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래서 감독은 호수비보다 루틴 플레이를 더 좋아하고, 나이스 플레이를 루틴으로 보이게 만드는 선수를 진정한 수비의 달인으로 본다.
타자들도 예측한다. 덕아웃에서 또는 대기타석에서 상대 배터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을 던지고 타자를 상대하는지 유심히 지켜본다. 이미 경기 전 선발투수의 특징과 그동안의 맞대결 경험을 통해 그 선수가 던지는 공의 궤적에 대해선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준비시킨다. 예측과 선택이 직업인 덕아웃의 사람들(감독과 코치)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한다. 대타 또는 대수비, 대주자들도 언제 그라운드에 들어가고 무엇을 할지 미리 준비해둬야 유리하다. 그래서 잘하고 못하는 팀은 덕아웃을 보면 안다.
‘생각’이 나온 김에 떠오른 것이지만, 요즘 너무 생각 없는 행동이 많아졌다. 상대가 도발했다고 관중이 보는데 배트를 집어던지거나 공을 던지는 것은 문제다. 어떤 생각으로 그랬을까. 이런 선수들에게 내린 징계가 솜방망이인 것도 아쉽다. 5월 31일 잠실 삼성전 9회초 보여준 LG의 행위는 프로야구라는 말을 붙이기가 송구스러웠다. 팬과 관중을 먼저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누구나 생각은 하고 살지만, 때와 장소에 따른 올바른 생각은 어렵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