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조정은 “엘리자벳 역, 처음엔 엄두가 안 났죠”

입력 2015-07-09 0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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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막이 오르자 기존의 엘리자벳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인공 조정은.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난 조정은은 “요즘 다시 연기가 재밌어졌다”며 배우의 삶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뮤지컬 ‘엘리자벳’의 히로인, 조정은


배우의 길, 정석대로만 걷다 한때 방황도
엘리자벳 역도 자신 없어 몇 번이나 고사
요즘 다시 ‘연기가 재미있구나’ 느끼는 중


옥엘리보다 ‘더 나은’ 세계는 몰라도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 조엘리. 배우 조정은(36)은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지금까지 ‘엘리자벳의 교과서’로 군림해 온 옥주현과는 사뭇 다른 매력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성곡미술관 인근의 아담한 카페에 나타난 조정은은 조금 굳어 보였다. 마치 말년의 엘리자벳처럼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여미고 있었다. 경험상 이럴 땐 “공연 잘 봤다”는 말이 문을 여는 열쇠다. 것 봐라. 조정은이 살짝 웃었다.

조정은이 엘리자벳에 캐스팅되었다는 말에 손뼉을 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맡아 온 역할마다 조정은만의 기품이 넘쳤다.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가 그랬고, 그녀에게 선녀라는 별명을 안겨준 ‘피맛골연가’의 홍랑이 그러했다. 엘리자벳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 팬들의 기대였다. 하지만. “실은 (지난 공연에서도) 몇 번 제안이 있긴 했는데, 못 하겠다고 했어요.” 조정은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엘리자벳을 두고 누구나 조정은을 떠올렸지만, 정작 본인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작품”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엘리자벳은 너무나 스케일이 크고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캐릭터예요. 제가 맡았던 역할들은 이런 적이 없었죠.” 오디션을 앞두고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에 “하더라도 3회, 많으면 4회만 하겠다”고 요구했다. 출연이 확정되고 나서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연습실에 들어서면 모든 게 낯설었다. “에둘러 피해갈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된 거 한 번 가볼까?”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지 모르는 엘리자벳, 그녀만의 빛

‘오스트리아의 연인’으로 불렸던 황후 엘리자벳은 일평생 자유를 얻기 위해 황실과 전통이 쌓아올린 벽과 마주해야 했던 여인이었다. 결국 극 중에서 황후는 ‘죽음(최동욱 분)’의 품에 안기어 눈을 감는다. 조정은은 “안타깝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죽음이 그녀를 구원한 것처럼 극은 끝나지만 “그것이 진짜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삶이 자유로운가”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조정은은 “어렸을 때(20대∼30대 초반)보다는 자유롭다”고 했다.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무엇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를 나이가 먹을수록 알게 되었다고 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조정은은 ‘배우의 길’을 정석대로 걸어왔다. 예고(계원)를 나와 대학(동국대)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서울예술단원을 거쳐 정상의 뮤지컬 배우로 섰다. 그런데 그녀는 놀라운 말을 했다.

“드라큘라(2014)를 하기 전까지 ‘이게 내 길이 맞나’하고 고민했다. ‘내가 정말 배우가 맞나’, ‘지금이라도 다른 걸해야 하지 않나’.”

의외라고 하니 조정은은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게 전 의외예요”하며 웃었다. 레미제라블(2013·판틴 역)을 마친 그녀는 소속사에 “내게 자유를 달라”고 선언하고는 6개월을 쉬었다. 복귀작은 고향과도 같은 서울예술단과 호흡을 맞춘 ‘소서노’였다. 조정은은 “드라큘라를 하면서 ‘연기가 재미있구나’를 조금씩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당시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인터뷰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무대 위의 조정은은 빛이 났다.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한 줌에 쥐어질 듯 가냘펐다. 그녀가 보여준 ‘위태로운 강함’은 잊혀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가 ‘나는 나만의 것’, ‘내가 춤추고 싶을 때’를 부를 때는 주먹을 쥐었고, 그녀가 죽음의 품 안에서 팔을 떨굴 때는 조금 울었다.

같은 대본, 같은 악보를 가졌지만 조정은의 ‘엘리자벳’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조정은은 말했다. “모든 게 진짜일까. 아니면 내가 진짜인 척 하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커튼콜에서 하염없이 흘렸던 조정은의 눈물만큼은 틀림없는 진짜였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 빛이 났으니까.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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