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경의 만나고 싶은 사람] 정선희 “恨의 아이콘 된 나, 좀 행복해져야겠더라”

입력 2015-12-07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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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恨)과 화(火)의 아이콘이 됐더라고요. 하하.”

11월 11일 ‘하루 세 줄, 마음 정리법(이하 ‘하루 세 줄’)’ 북콘서트에서 방송인 정선희가 입을 뗀 첫 마디. 최정상의 위치에 섰던 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큰 아픔’을 겪고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이런 말을 웃으며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바깥 시선이 두려워 외출도 삼갔다. 살기 위해 스스로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그게 해결책이 안 될 것이라는 깨달은 순간, 욕심과 집착을 내려놨다.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보다 인생 여정의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내려놓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정선희는 미소를 되찾았다.

그의 유쾌한 우뚝 서기가 시작된 셈이다.


● “흥미 없던 자기계발서, 좋은 에너지 받았죠”

‘북콘서트’ 이후 정선희를 따로 만났다. 그는 요즘 ‘적당히’ 유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딱히 즐거운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하루를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의 행복함이다. 고등어 한 마리를 사러 슈퍼에 가는 것도 그에겐 보람찬 일이다. 이것은 ‘하루 세 줄, 마음 정리법’ 번역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정선희가 ‘하루 세 줄’의 번역을 맡게 된 것은 올해 4월. 2년 전 한 프로그램에서 ‘욕 일기’를 쓴다고 말한 뒤 출판사 대표가 번역 요청을 했다. 제안을 받고 3주간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3주간 원서를 읽었고 번역을 시작했다. 이미 일본어 교제를 번역해 본 경험이 있던 그였지만 자기계발서는 달랐다. 정신과 의사가 쓴 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나름의 고초를 겪었다.

“독서 취향이 소설이라 자기계발서는 영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좋은 글만 써져 있어 내용이 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약간 사람 홀리려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세 줄의 일기로 정리하면서 감정을 정리한다는 내용이 좋았어요. 저도 요즘 하루 세 줄 일기를 쓰고 있거든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하루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서 감정의 온도를 조절한다는 게 도움이 됐어요. 일기를 적으면서 계획도 적는데 ‘고등어 사기’, ‘은행가기’ 등을 별거 아닌 일과를 적지만 그걸 실천하면 좀 보람된다고 할까요. 생활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안정된 마음을 가지니 몸도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 같고, 또 몸에 좋은 것을 먹게 되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이 고된 세상살이에 멈출 여유가 없잖아요. 책 홍보도 홍보지만, 정말 정신 건강을 위해 일기를 쓰면 좋겠어요.”

일본어를 잘하는 그였지만 ‘혈관’, ‘세포’, ‘자율신경’ 등 사람의 신체구조와 의학적인 용어가 많기에 원서를 통으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어려울 작업이었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서적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밤샘작업을 하느라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며 “알레르기를 얻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제가 일을 만든 거죠, 뭐. (웃음) 우리나라에 살면서 외국어를 활용할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일본어를 쓰려면 동기부여 할 거리를 찾아야했죠. (번역과 같은)기회가 어학적인 부분을 단련하는 과정이 되고 머릿속에만 있는 것들이 정리가 돼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어떤 건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글로 정리하려면 잘 안 되는 거요. 번역도 그래요, 머리로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는데 글로 옮기려면 한 번 정리를 하니까 생각도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요.”



● “방송만 내 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정선희는 현재 SBS ‘동물농장’ 정도의 방송 스케줄만 소화하고 있다. 1992년 SBS 공채 1기 개그맨으로 데뷔 후 유쾌한 말재간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와 사랑을 누리며 살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방송 활동을 자제해야 했다. 강제 휴식(?)을 취해야 했다. 다시는 방송 복귀를 못하면 어쩌나 고민도 많았다. 방송활동만이 자신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보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은 많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말이다.

“오랫동안 방송활동을 하다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의 구미에 맞춰 살고 있더라고요. 어떤 행동을 해도 눈치를 보게 되고요.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도 했어요. 수년이 지나고 나서 ‘내가 좀 행복해져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어요. 지나간 버스를 계속 기다리는 것처럼 제가 쓸데없는 것을 부여잡고 있진 않나 되뇌며 그냥 하루하루를 값어치 있게 살아보자고 결심했죠. 그렇게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니 운이 좋게도 번역 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정선희는 하루도 쉴 틈 없이 살아온 20대 시절을 ‘정리가 안 된 방’이라고 비유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의 가장 아닌 가장이 된 그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방송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물질이나 좋은 평판을 지키는 게 우선 순위였다. 그는 “어렸을 땐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두고 무작정 달려서 정작 봐야 하는 경치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며 “내 마음은 마치 귀한 보물이 많지만 귀하게 보이지 않는, 정리가 안 된 집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야 집 정리를 시작했다. 청소하는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이제야 집 먼지를 털고 물건들을 정리하는 기분이다. 10년 뒤에 스스로에게 칭찬해줄 만한 삶의 과정을 밟게 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마음속에선 대청소를 시작했다면 몸은 다시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젠 내 인생은 끝났다”라고 생각했고 살기 위해 퇴로를 찾았던 과거를 뒤로 한 채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회적 평판을 잃었잖아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살려고 몸을 움츠리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 바깥은 일제 나가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삶의 오기가 생기더군요. 이젠 도망치는 퇴로가 아닌 문을 열고 나설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맨땅에 헤딩이 시작된 거죠. 속된 말로 거의 ‘미친 여자’처럼 다녔어요. 억지로 사람을 만나고 혼자서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요. 그렇게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이틀을 앓아누웠죠.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안 쓰던 근육을 처음 쓰면 아프지만 쓰다 보면 점점 괜찮아진다고요. 마치 제 생활이 그랬던 것 같아요. 나가기 시작하니까 점점 웃게 되고 사람들과 마주쳐도 먼저 인사를 하고 운동도 시작했어요. 8년이라는 세월을 돌아 돌아서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힘들지만 필요한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 “한 많은 할머니? 담백한 할머니로 늙고 싶어요”

과거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으로 인기를 얻은 정선희에게 방송인으로서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물었다. 그는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참 바빴더라. 그래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 ‘시간’에 가장 알맞은 수식어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만약 프로그램이 더 들어온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주면서 활동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 평판에 대해 민감하잖아요. 이건 연예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의 가치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매겨지고 거기에 웃고 좌절하잖아요. 그리고 아무도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저 역시 방송생활을 했을 때는 남들로부터 듣는 그 평판에 굉장히 의지했거든요. 그런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남들의 평가보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 거기로부터 내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걸 깨달으면서 인기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정선희는 방송 활동은 안 하지만 강연자로 서기도 한다. 최근에는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그는 “아이들의 눈빛이 살아있어 나도 에너지가 넘쳤다. 그래서 일기장에 ‘대구 강연, 예쁜 것들’이라고 썼다. 그들의 생기 있는 반응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최근 조카에게 “공부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봐”라고 했다. 이후 조카가 “이모, 이런 말을 해주는 선생님이 많으면 학생들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라며 먼저 책을 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참 뿌듯했죠. 전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조카가 그 말을 유심히 생각하고 먼저 꿈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니 보람되더라고요. 말 한마디에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또 호기심 있고 담백한 할머니로 늙고 싶어요. 남을 포용할 줄 아는 따뜻하고 친절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한 많은 할머니로 남고 싶지 않아요. (웃음)”

※정선희가 번역한 ‘하루 세 줄, 정리법’은 어떤 책?

‘하루 세 줄, 마음정리법’은 영국왕립소아병원과 아일랜드 국립병원을 거쳐 준텐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고바야시 히로유키가 20년간 스트레스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버을 찾아 실험하고 연구해온 방법인 수면법, 식사법, 운동, 호흡법, 명상법, 시간활용법 등을 정리한 저서이다. 출판사 지식공간 도서정가 10000원.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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