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유한준이 26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의 키노 스포츠콤플렉스에서 스포츠동아와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한준은 2015시즌 종료 후 4년 60억원에 kt와 FA 계약을 했다. 투산(미 애리조나주)|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후배들에게 좋은 말동무·도움 주고 싶어”
유한준(35·kt)은 관중석의 팬들보다 야구장 안팎이 일터인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은 선수였다. 언제나 겸손하고,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환한 미소가 매력적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크게 이름을 날리는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래도 성실성과 팀을 위한 헌신에선 항상 1등으로 꼽혔다.
2004년 현대에 입단한 뒤 1년을 꼬박 2군에만 있었다. 빼어난 외야 수비능력을 발판 삼아 2005년 1군에 데뷔해 3시즌 동안 백업으로 뛰었고, 2년간 상무 유니폼을 입고 군복무를 마치자 그 사이 현대라는 팀은 사라졌다. 넥센으로 합류해 묵묵히 최선을 다했지만, 2013년까지는 프로 10년 동안 단 한 시즌도 3할 타율이나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사람 좋고, 수비 잘하고, 팀에 꼭 필요한 소금 같은 존재이나 반짝반짝 빛나지는 못했던 평범한 야구선수 유한준에게 프로 11년 만에 반전이 일어났다. 2014년 타율 0.316(405타수 128안타)에 20홈런 91타점으로 타격에 눈을 떴고, 2015년 타율 0.362(520타수 188안타)에 23홈런 116타점으로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리고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 데뷔 이후 12시즌을 마치고는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어 4년 총액 60억원에 kt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26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 투산의 키노 스포츠콤플렉스에 차려진 kt의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유한준은 언제나 그러했듯 밝은 미소로 새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었다. 결코 짧지 않았던 시련과 좌절의 시간을 이겨내고 대형 FA가 된 유한준은 진지하게 자신이 꿈꾸던 ‘그라운드의 카운슬러’에 대해 털어놓았다.
-수원에 돌아왔다. 새 팀 분위기는 어떤가.
“고등학교(유신고) 시절 수원구장에서 프로선수를 꿈꿨다. 2004년 현대에 지명돼 2005년 처음으로 1군에 올라갔는데, 그 때 첫 홈구장도 수원이었다. 간절하게 프로선수를 꿈꿨던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목표를 갖고 출발하게 됐다. 워낙 잘 알고 지내던 선수들이 많아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많은 분들이 세심하게 배려해줘서 감사할 뿐이다.”
-2014년부터 공격지표가 확 달라졌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식당 주방장들도 인생을 걸고 쉼 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모두가 유명한 식당이 되지는 않더라. 대부분의 야구선수들도 인생을 걸고 노력하지만 다 유명한 선수, 빼어난 선수가 되진 못한다. 훌륭한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준비하고, 또 어떻게 그라운드에서 플레이하는지 지켜봤다. 모두 각자 자신만의 무엇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완벽한 자신만의 것을 갖춰야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부분을 노력했다. 나만의 루틴이 생겼고, 그런 것들이 완성되면서 점차 좋은 기록을 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왔다. 무명의 시간도 길었다. 큰 성과를 올리기 전까지 인고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나.
“2년 또는 3∼4년 정도다. 다른 사람에 비해 짧다고 생각한다. 지금 많이 후회되는 부분은 그냥 속으로 꾹꾹 참은 것이다. 열심히 했는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와 좌절감이 반복될 때 아픔은 매우 크다. 만약 그 때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조언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지금은 더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주위라고 하면 1군 선수가 되기 위해, 주전 선수가 되기 위해, 또는 FA라는 결실을 향해 뛰는 후배 선수들인가.
“팀이 큰 투자를 했다면 그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감도 있다고 본다. 야구를 잘하는 것은 FA 선수이기 때문에 이제 기본이다. 팀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주위에 수년 전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아픔을 느끼고 있는 후배들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한 전쟁터다. 많은 젊은 선수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쑥스럽게 웃으며)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편안하게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 그라운드에서 역할도 잘해야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고 있다.”
최근 여러 구단이 심리상담전문가를 고용하고,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을 주선하는 등 선수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과거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선수들이 바라는 최고의 처방은 진심으로 따르는 선배의 따뜻하고 정성담긴 조언인지 모른다. 유한준은 오랜 시간 프로에서 생존을 고심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골든글러브 외야수로 도약했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있다. 유한준이 꿈꾸는 ‘그라운드의 카운슬러’는 그에게 가장 어울리고,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인 듯하다.
투산(미 애리조나주)|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