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하늘로 던진, 세상 가장 아름다운 시구

입력 2016-05-27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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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대전한화이글스파크에서는 시즌 초 온 가족이 야구관람을 약속했지만 갑작스럽게 남편을 떠나보낸 이숙희씨가 하늘나라에 있는 아이들 아버지에게 편지를 읽고(아래), 딸이 시구를 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제공|한화이글스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시구, 야구가 주는 또 하나의 감동

일주일에 한번은 가족끼리 뭉치자며
토요 시즌권 산 한화 열혈 팬 아버지
뇌경색으로 한경기도 못 보고 하늘로
사연 접한 구단, 시구자로 가족 초대
딸 혜진씨 시구에 팬들 뜨거운 박수


“한화 이글스의 골수팬인 남편을 따라, 우리 가족 모두 열혈팬이 됐습니다. 각자 세상살이가 바쁘고 힘들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야구장에서 가족으로 뭉쳐 함께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며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토요일 시즌권도 함께 구매했지요. 하지만 시즌 첫 관람 경기는 비가 와서 취소됐습니다. 두 번째 관람 경기가 열리기 직전 남편은 갑작스레 쓰러졌고, 일주일 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빠 없이 처음 생일을 맞는 우리 예쁜 딸에게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곳에서 특별한 추억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딸아, 앞으로도 함께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며 씩씩하게 살아가자. 생일 축하하고, 사랑한다. 우리 딸!”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22일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 kt전에 앞서 이숙희(58)씨는 그라운드에 서서 낭독문을 읽어나갔다. 관중석의 팬들은 전광판에 문구로 흘러나오는 사연을 듣고는 숙연해졌다. 이어 딸 정혜진(31) 씨가 힘차게 시구를 하자 모두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어머니의 낭독문처럼, 아버지 정광채씨는 한화 골수팬이었다. 류현진을 응원했고, 김태균을 좋아했다.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한화의 열성팬이 됐다. 가족은 야구를 통해 많은 추억을 쌓았다. 아버지와 아들딸은 함께 캐치볼을 하며 성장했고, 한화를 응원하기 위해 천안 집에서 대전구장까지 나들이를 하곤 했다. 야구는 가족을 이어주는 끈이었고, 야구장은 소통의 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찬희(34)씨와 딸 혜진씨가 직업인이 되면서 가족은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특히 딸이 여군 대위로 경기도 양주에서 군복무를 하는 관계로 더더욱 만날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우리 가족끼리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뭉치자”며 올 시즌 개막에 앞서 토요일 한화 홈경기 시즌권 4장을 구매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올 시즌 한 경기도 관전하지 못했다. 첫 토요일 홈경기였던 4월16일 LG전을 보기 위해 온 가족이 이글스파크를 찾았지만, 하필이면 1회초 시작하자마자 우천 노게임이 선언됐다. 다음 토요일 홈경기는 4월30일 삼성전.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이 모이기 이틀 전에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가족은 이제 더 이상 이글스파크에서 함께 모일 수 없다.

어머니는 가슴 아픈 이 사연을 한화 구단에 보냈다. 당초 팬들에게 애국가 제창의 기회를 주는 사연을 공모하는 코너였지만, 한화 구단은 사연을 접하고는 가족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구의 기회를 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겠느냐”고 역으로 제안했다.

22일은 딸 혜진씨의 생일. 이날 한화 선발투수는 공교롭게도 등번호 22번을 달고 있는, 혜진씨가 가장 좋아하는 이태양이었다.

“아버지와 캐치볼을 함께 한 적도 있었는데, 아버지께 공을 던진다는 마음으로 시구를 했어요.”

아지랑이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봄날, 혜진씨가 던진 공은 푸른 하늘에 하얀 무지개를 그리며 아버지에게 안부를 물었다. 팬들은 봄날처럼 가슴 따뜻한 장면에 눈시울을 붉히며 기립박수를 쳤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토요일 홈경기 시즌권은 이제 어떻게 할까. 혜진씨 가족은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어 시즌권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한화는 티켓 한 자리 값은 환불해주되, 그 자리를 계속 비워두기로 했다. 한화를 좋아했던 혜진씨의 아버지가 언제든 이글스파크에 방문해 응원할 수 있도록 ‘명예 시즌권 1호’로 지정해 선물하기로 했다.

시구는 야구장의 첫 언어이자 시그널이다. 그래서 퍼스트피치(First Pitch·始球)라 부른다. 정치인과 연예인의 시구보다는, 마음으로 던지고 가슴으로 받는 이런 시구가 우리에게 더 큰 감동과 울림을 전한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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