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소인국’에 꿈을 심는 ‘걸리버’ 박철순

입력 2016-06-24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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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은 요즘 어린이들과 공놀이에 빠져 지낸다. 4년 전부터 ‘서울시와 함께 하는 어린이야구교실 총감독’이란 직함을 갖게 된 그는 서울시의 5개구를 돌며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18일 영등포구 영중초등학교에서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는 박철순. 스포츠동아DB

■ 프로야구 원년 22연승 ‘전설의 불사조’…어린이야구교실서 소리없는 재능기부


“요즘 이 친구들 보는 재미로 살아
부모님께 들었나? 레전드 대접도
보는 게 많아선지 실력 빨리 늘어

함께 재능기부 중인 김용철 감독
이 친구가 내 22연승 끊었다니까”


34년 전 그는 ‘소인국에 온 걸리버’였다.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만나는 타자마다 가볍게 쓰러뜨리며 연전연승 행진을 펼쳤다. 팀당 80경기를 소화한 국내 프로야구 원년. OB 에이스로 36경기에 등판해 22연승 신화를 쓰며 24승(4패) 7세이브를 거뒀다. 그의 세련미 넘치는 역동적 투구폼은 동네야구 좀 하던 어린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따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불사조’ 박철순. 세월 속에 박제된 추억을 뒤로 하고,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영중초등학교로 찾아갔다. 6월의 햇살은 아침부터 눈부셨다. “프로야구 취재하기도 바쁘실 텐데 뭘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악수를 청하며 웃는 눈가에 주름살이 가득 잡힌다. 1956년생. 그러고 보니 긴 머리 휘날리며 천하를 호령했던 ‘불사조’도 벌써 올해 나이 환갑이다.

“제가 원래는 1954년생입니다. 호적상으로 1956년생이고요. 사실 재작년에 가족과 환갑잔치를 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죠?”

그의 말처럼 세월은 그렇게 쏜살처럼 흘렀다. 그의 청춘도, 그의 전설도, 그리고 우리의 추억도, 세월과 함께 그렇게 빨리 흘러왔다.

스포츠동아DB

“이 친구들 실력이 정말 빨리 늘었어요. 정식 야구부원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씩 토요일에 모여 이렇게 연습하는데 말이죠. 난 저만할 때 체격도 작고, 공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보는 게 많아서 그런지 실력이 빨리 늘어. 허허. 하긴 요즘 하루 5경기씩 매일 TV로 중계되고 메이저리그 경기도 중계되는 세상이니…. 전 요즘 이 친구들 보는 재미로 삽니다.”

그를 찾아간 이유였다. 박철순은 요즘 어린이들과 ‘공놀이’에 빠져 지낸다. ‘서울시와 함께 하는 어린이야구교실 총감독’. 4년 전부터 갖게 된 직함이다. 한국프로야구 OB회인 사단법인 일구회와 서울시 교육청이 힘을 합쳐 만든 교육프로그램으로, 서울시의 5개구(강서구·강북구·양천구·용산구·영등포구)에서 매년 1개씩의 초등학교를 선정해 토요일마다 야구를 가르쳐주고 있다. 학교마다 감독과 코치 1명씩을 두고 있는데, 박철순은 총감독을 맡아 5개구 학교를 순회하며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영중초에는 또 다른 원년 스타 김용철(59) 전 경찰야구단 감독이 함께 한다. ‘다문화야구연맹’을 창설해 회장을 맡고 있는 김 감독 역시 매주 토요일 영중초에 재능기부를 위해 들른다. 박철순은 김용철의 얼굴을 보더니 추억 한 토막을 꺼냈다.

박철순-김용철(오른쪽). 스포츠동아DB

“이 친구가 제 22연승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잖아요. 롯데전(1982년 9월22일)이었는데 더블헤더였어요. 전 원래 더블헤더 제2경기 선발등판 예정이었는데, 1경기에서 9회초에 1-3으로 뒤져 있다가 3-3 동점을 만드니까 김영덕 감독님이 승리 하나 더 챙겨주시려고 그랬는지 9회말에 등판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연장 10회말 1사 2루서 김용철한테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맞았지 뭡니까. 몸쪽 꽉 찬 공이었는데 정말 잘 받아쳤어요. 연승이 깨진 순간이었으니까 아직도 생생해요. 제가 부산 출신으로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거든요. 김용철 감독은 초등학교 2년 후배로 야구를 함께 했어요. 그런데 이 빌어먹을 친구가 연승 깨놓고 그 이후에 사과도 없네.”

김용철 전 경찰야구단 감독은 ‘다문화야구 연맹’을 창설해 회장까지 맡고 있다. 요즘은 매주토요일만 되면 재능기부를 위해 영중초등학교를 찾는다. 18일에는 ‘서울시와 함께 하는 어린이야구교실 총감독’ 박철순과 함께 꿈나무들을 지도했다. 스포츠동아DB

두산 요즘 야구 잘해
김태형 감독 잘할 줄 알았지

선배의 농담에 김용철 감독은 억울한 표정이다. “롯데가 형님 연승할 때 3~4승은 보태드렸잖아요.”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다.

친절한 ‘키다리 아저씨’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에게 투구폼과 기본기를 가르쳐주면서 얼굴 한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아저씨가 누구인지나 알까. “모른다”는 대답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다. “레전드 투수잖아요. 부모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인터넷에 ‘박철순’ 쳐보니 대단하시더라고요. 이런 분에게 야구를 배우는 게 신기해요.”

박철순은 지금 야구 전도사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에는 야구 불모지 스리랑카까지 가서 50일간 야구를 가르치고 오기도 했다.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스리랑카 야구협회가 대한야구협회 쪽에 ‘한국에서 스리랑카대표팀 감독을 맡아줄 분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해왔는데, 철순이 형이 흔쾌히 ‘해보겠다’더니 비행기표 하나 달랑 들고 홀로 떠났다 돌아왔다. 스리랑카가 동아시아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는데 현지 TV에 중계도 되고 그랬다. 서울시와 함께 하는 야구교실 총감독도 사실은 큰 돈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재능기부다. 원년의 스타였지만 조용히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찾고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스포츠동아DB

모두가 불빛을 좇는 세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프로야구가 그립지 않을까. 박철순은 “에이, 타이밍이 늦었지. 이제 저는 야인입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어린이가 좋아요. 원년부터 어린이들한테 만큼은 껌종이를 내밀어도 꼭 사인을 해줬어요. 세월이 흘렀지만 또 이런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으니 보람 있습니다. 참, 그건 그렇고 요즘 두산 참 야구 잘합디다. 저는 김태형 감독이 어릴 때부터 나중에 감독하면 잘 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공을 받아준 전담배터리였는데 불평불만이 없고 속으로 잘 삭이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때부터 감독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요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닐 겁니다.”

34년 전 소인국에서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타자들을 쓰러뜨렸던 걸리버는 이제 또 다른 소인국에서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꿈을 만들어주고 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악수. 추억과 추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불사조가 부르는 ‘마이웨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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