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의 굿모닝 MLB] 공격형 포수 피아자, 명예의 전당 입성

입력 2016-07-25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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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피아자-켄 그리피 주니어(오른쪽)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신인드래프트 1390번째 선수의 기적
야구광 부친과 라소다 감독의 작품
1993년 데뷔 첫해 NL 신인왕 차지
총 12차례 올스타·427개 홈런 활약

메이저리그 최고의 영예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이다. 1월 6일 실시된 전미야구협회 멤버들의 투표 결과 켄 그리피 주니어와 마이크 피아자만이 2016년의 새 멤버로 뽑혔다.

역대 신인드래프트 전체 1번 지명 선수 중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그리피 주니어는 첫 번째 도전이지만 440명 중 437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99.32%의 투표율로 1992년 톰 시버가 얻었던 98.84%를 능가하는 역대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반면 피아자는 4번째 도전 만에 꿈을 이뤘다.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꼽히는 피아자는 365표로 8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플레이어 아버지를 둔 그리피 주니어가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는 달리 피아자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야구만 따지만 ‘흙수저’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엘리트코스만을 거쳐 온 그리프 주니어와는 달리 온갖 역경을 딛고 명예의 전당 관문을 뚫은 피아자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 1390번

198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61라운드가 진행될 때까지 그 어느 팀도 피아자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 62라운드에 돌입해 1390번째에서야 LA 다저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날 드래프트에서 피아자보다 뒤에 지명된 선수는 고작 5명뿐이었다. 피아자는 자신보다 앞서 지명된 1389명을 제치고 동기들 중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기적을 이뤄낸 셈이다. 오늘날의 피아자가 있기까지는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의 부친은 중고차 딜러로서 1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한때는 메이저리그 구단 인수를 고려할 정도였으며, 피아자의 대부인 토미 라소다 전 감독과는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다. 5명의 아들 중 한 명이라도 메이저리거를 배출하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던 부친은 피아자가 12살 때 테드 윌리엄스에게 타격지도를 받게 할 정도로 엄청난 야구광이었다. 뒷마당에 꾸민 연습장에서 매일 밤 피아자에게 수백 개의 볼을 직접 던져주곤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피아자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명문대학교의 입학 제의조차 받지 못했다.


# 대부 토미 라소다

실의에 찬 부친은 절친인 라소다 당시 감독을 찾아가 2년제 대학에 진학한 피아자를 다저스 구단에서 드래프트해 달라는 청탁을 했다. 하지만 감독의 입김에도 불구하고 다저스 스카우트 팀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타격 재능만큼은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있는 라소다 감독은 피아자의 포지션을 1루수에서 포수로 변경하는 조건까지 내걸며 스카우트팀에 읍소 작전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62라운드에서 지명된 피아자는 곧장 훈련에 돌입했다. 장소는 미국이 아닌 도미니카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써보는 포수 마스크와 엄청나게 무거운 보호 장비들과의 싸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페인어를 단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피아자에게 도미니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가 큰 시련이었다.

마침내 플로리다주 베로비치로 옮겨 와 싱글A팀에 소속된 피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팀을 이탈했다. 가뜩이나 포지션 변경으로 훈련에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주위에서는 라소다 감독의 도움으로 지명된 형편없는 선수라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이틀 만에 피아자는 팀에 복귀했다. 대부 라소다 감독의 따끔한 질책과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하면 인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꼬리를 내린 것이다.


# 피아자의 저주

피아자의 생애 첫 홈런은 1992년 9월 12일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나왔다. 상대투수는 지난해까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감독을 맡았던 버드 블랙이었다. 루키 시즌인 1993년 피아자는 149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8, 35홈런, 112타점의 놀라운 기록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1997년은 그에게 최고의 해였다. 타율 0.362, 40홈런, 124타점을 올리며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하지만 다저스는 1998년 토드 질과 함께 피아자를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했다. 당시 프레드 클레어 단장도 모르게 극비리에 추진된 트레이드여서 큰 파문이 일었다. 불과 5일 만에 다시 뉴욕 메츠로 둥지를 옮긴 피아자는 서브웨이 시리즈로 치러진 2000년 월드시리즈에 팀을 이끄는 등 큰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반면 피아자를 떠나보낸 다저스는 아직까지 월드시리즈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있다.

통산 12차례 올스타에 선정된 피아자는 427개의 홈런을 때렸다. 그 중 396개는 포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담장을 넘긴 것이다. 25일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열리는 명예의 전당 입회식에서 다저스가 아닌 뉴욕 메츠 모자를 쓰고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라소다 전 감독을 비롯한 다저스 팬들에게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행사가 될 전망이다.

MBC스포츠플러스 메이저리그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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