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희진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트릭’(감독 이창열)의 촬영장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희진은 최근 개봉한 ‘트릭’에서 반전의 키를 쥔 여인 희경역을 맡아 열연했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와는 다르게 촬영장은 화기애애했고 웃음이 넘쳤다. 말 그대로 행복한 경험이었다.
“촬영이 거의 지방에서 진행돼서 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마치 소풍을 가는 기분이었어요. 매니저도 제가 현장 갈 때 표정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촬영장 갈 때 긴장을 하거나 부담감을 가진 티가 역력했는데 이번 현장은 즐거워 보인다고 좋아했어요.”
인터뷰 내내 촬영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며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보이는 그였지만 아직은 대중들에게 ‘배우’ 이희진보다는 ‘베이비복스’ 이희진으로 더 친근한 것이 사실. ‘베이비복스 출신’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온전히 이희진으로만 봐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긴 한데 베이비복스라는 타이틀을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베이비복스로 많은 혜택을 얻었고 지금도 얻고 있고요. 제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에는 연기자 이희진으로 온전히 봐줄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 순간을 기다려요.”
베이비복스로 많은 혜택을 얻었지만 그래서 연기자로서의 길이 무조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편견과도 맞서야 했다.
“베이비복스 시절 시트콤으로 연기를 처음 시작했는데 스케줄 빼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시스템을 모르고 현장에 들어갔더니 벽을 많이 느꼈어요. 낙하산처럼 들어갔기 때문에 선배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받았죠. 그때 ‘내가 연기를 계속하려면 많은 준비를 하고 공부를 하고 해야겠구나’ 결심을 했죠.”
누구보다도 많은 시행착오와 마음고생을 겪어서일까? 이희진은 연기를 병행하는 많은 아이돌 후배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보통 주조연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겪고 보니 이게 얼마만큼의 민폐인 지 알겠더라고요. 그만큼 신중해야 하고 책임감도 가져야 해요. 연기를 할 때만큼은 ‘나는 스타야’ 이런 생각을 접고 해야 해요. 아무리 아이돌로서 인기가 많다고 해도 연기는 신인이잖아요. 혼도 날 생각도 하고, 모르면 물어보고 겸손할 줄을 알아야 더 많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97년 데뷔한 이희진은 어느덧 내년이면 20년 차를 맞는 중견(?) 연예인이다. 지금은 다양한 콘셉트의 아이돌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20년 전만 해도 베이비복스는 굉장히 튀는 그룹이었다. 청순하거나 혹은 귀엽거나 양단의 이미지였던 걸그룹들 사이에서 섹시하면서도 파워풀한 베이비복스는 파격 그 자체였다.
“아직도 센 걸그룹으로 인식돼 있는데 멤버들은 막상 성향이 세지가 않거든요. 당시 사장님은 파워풀한 안무를 원했고 그런 곡과 콘셉트를 소화하다 보니 이미지가 너무 강해졌죠. 너무 야하고 노출이 심한 걸그룹은 아니었는데 섹시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이미지는 솔직히 속상해요. 그때 당시 핑클, S.E.S가 너무 부러웠죠.”
청순하고 요정 같은 콘셉트의 타 그룹이 부러웠다고 말하지만 베이비복스만의 색깔은 원조 걸크러쉬로 대중들에게 각인됐고 1세대 아이돌들의 재결합 열풍에 맞물려 베이비복스의 파워풀한 무대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의 열망도 뜨겁다.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재결합 의지를 물으니 조금은 조심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에 멤버들끼리 ‘우리 미니앨범 하나 내고 뮤직비디오 정도 기념으로 만들어 볼까?’ 이런 얘기는 한 적이 있는데 여건 상 무산된 적이 있어요. ‘1세대 걸그룹 중에 우리가 스타트를 끊어볼까? 뭔가 기념되고 의미가 있는 걸 해보면 좋겠다’ 생각은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베이비복스로서도 데뷔 20주년이 가지는 의미가 큰 것만은 확실했다. 새로운 마음가짐도 다잡게 되었고 초심을 위해 연극 무대에 서고 싶은 희망도 생겼다.
“그나마 연기가 조금 익숙해졌다고 요즘은 가슴에서 연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대사만 잘 뱉으려고 하는 걸 느끼고 두려워져요. 이 타이밍에 연극 무대에 서면 다시 초심을 다잡을 수 있고 연기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전 한 번에 높이 올라가서 꺾이고 싶은 생각은 없고 사람 냄새 나고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가늘고 길게 배우 생활을 하고 싶어요.”
그동안 주로 센 캐릭터를 맡아서 이제 따뜻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이희진은 얼마 전 tvN 드라마 ‘기억’ 특별 출연을 계기로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이성민 선배님을 만났을 때 너무나 보고 싶어 했던 분을 봬서 인지 심장이 터져서 죽을 뻔했어요. 온몸을 다 떨었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됐는데 너무 편안하게 이끌어주시고 인상도 좋으신 거에요. ‘아, 존경하는 선배들을 만나려면 내가 연기를 더 열심히 하고 잘 해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겠다’ 깨달았죠. 목표가 조금은 생긴 거 같아요. 언젠가는 그 선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며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동아닷컴 권보라 기자 hgbr36@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ㅣ위드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