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 경주에 모처럼 생기와 웃음이 넘쳐났다. 16일 촉촉하게 대지를 적신 가을비를 뚫고, 쾌적하고 안락한 희망의 관광도시 경주 일원을 힘차게 내달린 8000여 마라토너들 모두가 2016경주국제마라톤의 주인공이었다. 경주|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sajinman@donga.com
한국 귀화 추진중인 에루페, 5위 부진
엘리트 국내 男 이영욱·女 강수정 우승
“지진 아픔 딛고 일어서는 계기 됐으면”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펼쳐진 2016경주국제마라톤(경상북도·경주시·대한육상경기연맹·스포츠동아·동아일보 공동 주최)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영광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케냐의 건각 필렉스 킵치르치르 키프로티치(28)였다.
키프로티치는 16일 경주시민운동장을 출발해 4곳의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는 42.195km의 레이스에서 2시간6분58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우승상금은 5만달러(약 5600만원). 만약 키프로티치가 13초만 더 단축했어도 대회기록(2시간6분46초) 수립에 따른 추가 상금 5만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의미는 충분했다. 24세에 처음 풀코스를 뛴 키프로티치는 지난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기존 개인최고기록(2시간6분59초)을 세우며 2시간6분11초의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8·청양군청)에 이어 2위로 골인했다. 그리고 7번째 풀코스 도전인 이날 경주국제마라톤에서 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 월계관을 쓰는 영광을 누렸다. 키프로티치는 “아버지가 마라톤을 권유하셨다. 처음에는 기록이 좋지 않아 실망스럽기도 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다. 특히 최고 선수인 에루페를 이기고 우승까지 하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1. 케냐의 필렉스 킵치르치르 키프로티치(왼쪽 3번째)가 16일 경주 일원에서 펼쳐진 2016경주국제마라톤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뒤 월계관을 쓰고 기념촬영을 했다. 상금 5만달러를 받은 그는 사상 처음으로 풀코스 정상에 서는 영예를 누렸다. 2.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오른쪽 2번째)이 대회에 앞서 최근 지진피해를 겪은 경주에 성금 5000만원을 전달하고 있다. 이날 대회에는 김관용 경북도지사, 최양식 경주시장, 배호원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김석기 국회의원, 강형근 아디다스코리아 부사장 등도 참석했다. 경주|변영욱 동아일보 기자 cut@donga.com
실제로 이날 에루페의 기록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여전히 귀화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그는 올 6월 청양군청과 4년 재계약을 했는데, 역대 경주국제마라톤에서 3차례 정상을 밟는 등 국내에서 출전한 과거 6개 대회(경주국제 3회·서울국제 3회)를 모두 우승하는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올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5분13초로 역대 국내코스 최고기록을 쓴 에루페는 당초 이번 대회에서 2시간4분대 진입까지 노렸으나, 한 달 전쯤 찾아온 갑작스러운 오른쪽 아킬레스건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35km 구간을 기점으로 통증이 느껴지자 속도를 늦췄다. 결국 2시간8분52초(5위)로 레이스를 마쳤다.
한국마라톤도 다시 한 번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엘리트 국내 남자부 우승은 2시간19분40초의 이영욱(24·국민체육진흥공단)이 차지했다. 연령별 대표팀도 거친 적이 없는 새내기 마라토너의 탄생이지만, 풀코스 첫 우승이란 사실 외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개인최고기록인 2시간16분대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국내 여자부에선 경주시청 소속 강수정(25)이 2시간45분57초로 1위에 올랐다.
경주는 동아마라톤과 깊은 인연을 지닌 도시다. 1994년 경주에서 열린 동아국제마라톤 겸 제65회 동아마라톤에서 국내 처음으로 ‘마스터스’로 불리는 일반 참가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단일종목대회로는 처음으로 참가자가 1만명을 돌파한 무대도 1999년 경주에서 나왔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경주와 인연이 깊은 동아마라톤 개최로 경주가 최근 지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