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독 걸음이 느린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사람은 누가 자신을 제치고 지나가도 늘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차근차근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옆에서 조금 “빨리 좀 걸어보라”고 재촉해도 요지부동이다.
MBC 수목드라마 ‘쇼핑왕 루이’에서 활약한 배우 임세미도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결코 걸음이 빠른 사람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임세미 본인조차 “거북이 같지 않느냐”며 웃어 보인다.
“악역은 이번에 백마리 역을 맡아서 처음 해봤어요. 단막극에서 악역을 맡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긴 드라마에서 악역을 해본 적은 없었죠. 유독 마리는 해야 하는 게 많은 캐릭터였어요. 언젠가 PD님이 ‘가만히 보니까 마리가 제일 바쁘네’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지금까지 힘들었던 게 싹 사라졌죠.”
임세미는 그동안 ‘반올림’을 시작으로 ‘투윅스’,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 다양한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선한 얼굴과 말투로 인해 그의 악역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기류가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저도 불안했죠. 예전에 ‘쇼핑왕 루이’ PD님과 만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극이 진행 될수록 상황에 따가 마리가 점점 나빠지면서 주변 분들이 ‘세미 너는 좋은데 드라마 보고 나면 진짜 싫다’고 말하더라고요. 신기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죠.”
임세미가 연기한 백마리는 기존의 다른 드라마 속 악역에 비하면 매우 순한 축에 속했다. 임세미가 드라마 속에서 망가지고 실수를 연발할 때마다 ‘쇼핑왕 루이’는 착하고 재미있는 드라마의 톤을 유지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이 다 착한 드라마에서 악역을 하는 게 더 복잡하더라고요. 거기다가 캐릭터 설정이 미모의 커리어 우먼이라 의상이나 가방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했어요. 그렇게 하나씩 모아서 백마리를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어요.”
이처럼 임세미를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노력 끝에 ‘쇼핑왕 루이’는 수목극 경쟁에서 시청률 역전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조정석-공효진의 ‘질투의 화신’, 이상윤-김하늘이 출연한 ‘공항가는 길’을 상대로 이뤄낸 업적(?)이었다.

“사실 시청률에 대해서는 촬영장의 모두가 큰 욕심을 내진 않았어요. 하지만 같은 수목극 라인업을 듣고 나서 ‘우리한테 왜 이러나’ 이런 생각을 하긴 했죠. ‘그냥 우리끼리 즐겁게 찍자’는 마음으로 촬영 했어요. 그렇게 마치 아기가 자라듯이 시청률도 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초반에 표현한 것처럼 임세미는 결코 걸음이 빠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쇼핑왕 루이’ 속 백마리 역을 통해 그는 대중과 한층 더 가까워 졌고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백마리로 사랑을 받아 감사하지만 ‘왜 이제야 알려졌을까’ 같은 생각은 안해요. 다른 선배들처럼 제가 연기를 소름 돋게 잘하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분명히 예전에는 같이 연기를 시작한 친구들이 잘 돼서 본인이 하고 싶은 역을 선택할 수 있는 걸 부러워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따내 연기를 이어가는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이 있죠. 비중의 크고 작음보단 제 연기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가슴으로 잘 전달될 수 있는지 고민해 볼래요.”
동아닷컴 곽현수 기자 abro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