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끝이 보이지 않아 박두만이 외쳤다…“밥은 먹고 다니냐?”

입력 2017-08-18 06:57: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사건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전직 형사 박두만이 17년 전 현장을 찾는다. 안타까움과 절망, 극한의 아쉬움으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송강호의 연기가 일품이다. 스포츠동아DB

■ 영화 ‘살인의 추억’

최루탄 날아들고 군화발로 구타하던 시대
3명의 희생자가 나온 뒤 알려진 연쇄 살인
폭력 뒤에서 보호받지 못한 우리 부녀자들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1986년 9월15일 70대 이모 노파가 살해됐다. 다음날 정부는 내무·법무·국방 등 3부 장관 명의로 합동담화문을 발표했다. 며칠 전 발생한 김포공항 폭발물 사건과 관련한 담화였다.

이들은 ‘국가사회 안정 확보를 위한 합동담화문’에서 “다가오는 아시아경기대회를 방해하려는 북괴간첩 또는 그들의 사주를 받은 좌경불순분자의 반민족적 만행으로 판단한다”면서 “요즘 학원가 일부에서 예외 없이 가두소요, 공공건물 점거 등의 투쟁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화염병이 도시 게릴라식 파괴 책동과 반사회적 테러 행위에 이용되고 있는 점을 중시, 앞으로 이를 제적·소지·운반·투척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적행위로 간주,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달여 뒤 10월20일 20대 박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기도 화성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그 다음날 주요 일간지 사회면에는 “좌경용공 수사” 등 기사가 실렸다. 물론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잇단 살인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언론보도가 처음 나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87년 1월15일자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11월까지 3건의 밤길 처녀 강간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서 20대 주부 1명이 실종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미 세 명의 여성이 희생당한 뒤였다.

여성들은 이후 1986년 12월12일, 그 이틀 뒤, 다음해 1월10일, 5월2일, 1988년 9월 등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갔다.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벌어졌던,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연 인원 180만 명의 경찰이 수사에 참여했다. 또 3000여명의 용의자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일부 유사성을 띄는 사건의 범인을 제외하고는 경찰은 그 잇단 사건의 그림자조차 좇지 못했다. 그리고 각 사건의 공소시효는, 그 연쇄성을 인정받는 1991년 60대 권모 씨 살해사건을 마지막으로 이미 2006년 만료되고 말았다.

그 3000여명 경찰관 가운데 서태윤과 박두만이 있었다.

경기도 태령경찰서 소속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오로지 “사람 보는 눈”과 “감”에 의존해 범인을 쫓는 인물.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한다”며 서울에서 사건 해결을 위해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치달을 즈음,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를 매개로 수사는 급진전하지만 결국 이들이 쫓던 범인이라 추정하는 사내 박현규(박해일)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는 절망에 이른다.

그 오랜 사이에서 발목이 잘려진 군화가 등장한다. 형사 조용구(김뢰하)의 것이다. 그저 하던 대로 군홧질로 용의자를 짓밟고 구타하는 때 신었던 군화다. 하지만 새롭게 부임한 반장(송재호)의 거부감으로 군화는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만다.

군홧발이 잘려나간 것은 시국 관련 방송 뉴스가 흐르면서 술집에서 대학생들과 시비가 붙은 뒤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북중미 5개국 순방’ 환영 플래카드가 내걸린 도로, 페퍼포그와 최루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청카바’로 불리던 이른바 ‘백골단’이 시위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구타하는 모습, 뒤이어 비 오는 날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흐르는 동안 또 한 명의 희생자가 생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시위 진압하러 수원시내 다 나갔다”며 지원 병력 한 명 얻지 못해 속수무책인 경찰. 그 우악스런 폭력의 ‘수사 기법’으로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몰아붙여 현장검증에 나섰을 때 그려지는 슬로 모션의 해프닝은 안타까운 우화에 가깝기까지 하다.

사건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전직 형사 박두만이 17년 전 현장을 찾는다. 안타까움과 절망, 극한의 아쉬움으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송강호의 연기가 일품이다. 스포츠동아DB


그리고 세월이 지난 뒤 2003년. 첫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17년이 지난 뒤이다. 경찰관의 옷을 벗은 박두만은 개인사업차 길을 나선 뒤 익숙한 풍경에 차를 세우고 다시 논둑길을 걷는다. 첫 사건 수사에 나선 것처럼 배수구에 허리를 숙이는 박두만. 그를 바라보는 초등학생이 묻는다.

여학생 : 그 안에 뭐 있어요?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옛날에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 만에 한 번 와봤다 그랬는데.

박두만 : 그 아저씨 얼굴 봤어? 어떻게 생겼어?

여학생 : 그냥 뻔한 얼굴인데.

박두만 : 어떻게?

여학생 : 그냥…. 평범해요.

사건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전직 형사 박두만이 17년 전 현장을 찾는다. 안타까움과 절망, 극한의 아쉬움으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송강호의 연기가 일품이다. 스포츠동아DB


이어지는 박두만의 표정. 절망과 안타까움, 마치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잡지 못한 극한의 아쉬움을 가득 품은 눈빛. 어쩌면 좀 더 노력했다면 범인을 체포했을 수도 있을 막심한 후회, 그러지 못했던 자책…. 배우 송강호가 표현해낸 절묘한 장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한 부조리를 말해준다.

“훈련공습경보”를 통해 전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민방위훈련의 사이렌 속에서 숨져간 여성. “시위 진압하러 수원 시내”로 가는 바람에 그 숱한 레토릭이 되어 버린 ‘민생치안’의 허점. “정액 속 유전자 지문을 분석할 장비가 없”었던 당대의 후진성.

이를 담보한 힘은 공권력, 하지만 정작 시민의 안전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줄 치안의 힘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사이 10여명의 무고한 여성이 숨져갔다. 그것도 가장 변태적인 수법에 의한 범행으로.

대통령의 해외순방과 그 귀국길에 동원돼 그저 시키는 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 만세”를 외치게 한 시대. 최루탄과 지랄탄, 백골단의 무참한 폭력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던 시대. 무고한 생명의 스러짐보다는 “좌경불순세력의 책동”을 단속하는 것이 더 급했던 시대.

감독 봉준호는 그 시대의 마감됨을 조용구의 덩그러니 놓인 군화로 돌아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첫 살인사건의 현장인 배수구에 다시 돌아온 박두만이 드러내 보이는 표정. 그것은 공권력이라는 ‘우아한’ 이름 뒤에 가려진 허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몸부림을 애써 폭력으로 가리는 동안, 무참하게 또 무고하게 희생당한 부녀자들의 가해자는 여전히 찾을 수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따라해야 했던 민방위 등화관제 훈련 속에서 시민들은 통제 당했다. 그 속에서 또 다른 희생자는 생겨나고 생겨났다. 요란한 사이렌의 울림은 범인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못했다.

박두만 : 네가 정말 아니란 말야? 내 눈 똑바로 봐! XX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앞에서 절망적으로 내뱉는 박두만의 대사. 말쑥한 미소년의 얼굴로 피투성이 얼굴을 한 용의자 박현규에게 박두만은 왜 “밥은 먹고 다니냐?”고 말했을까.


■ TIP 영화 ‘살인의 추억’은?

2003년 개봉작.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 김상경이 주연한 영화. 김광림 작가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각색한 작품이다. 1980년대 경기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그 범인을 쫓는 두 형사를 중심으로 당대의 현실을 녹여내 호평 받았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