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생각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28)의 인터내셔널 데뷔앨범을 들었다.
지난 10월 27일 클래식의 명문 워너클래식을 통해 전 세계에 동시 발매되었다. 그래서 ‘인터내셔널 앨범’이다.
앨범에는 두 곡의 협주곡이 담겨있다.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단조(작품22)와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작품77). 모두 단조의 작품이다.
바르샤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김봄소리의 바이올린을 받쳤다. 지휘는 야체크 카스프치크.
김봄소리는 알려진 대로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최종결선에서 연주했던 곡이 바로 이 앨범에 수록된 비에냐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김봄소리의 데뷔앨범이 우승자보다 먼저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다. 우승자는 조지아 출신의 베리코 춤부리체였다.
이제 앨범을 듣자.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비에냐프스키의 대표작이다. 인생의 중반기 즈음에 작곡된 곡이지만 사실 그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감성이 가장 뜨겁고 싱싱하게 타오르던 20대에 쓴 작품이다.
초연은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와 안톤 루빈시타인의 지휘로 1862년에 이루어졌다.
1악장은 장엄하면서도 어딘지 음울한 구석이 있는 현악파트의 1주제와 호른 독주의 2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연주자,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공격적이고 호방한 연주가 있는가 하면, 우수가 뚝뚝 떨어지는 연주도 있다.
2악장은 저 유명한 로망스. 단독으로 떼어서도 자주 연주되는 베스트셀러다. 3악장은 ‘집시풍으로’라는 지시가 딸려 있다.
김봄소리의 비에냐프스키를 한 줄로 표현한다면, ‘우아한 슬픔’이라 적고 싶다. 그의 우수는 뚝뚝 떨어지지 않는다. 눅눅하게 들러붙지 않아 산뜻한 느낌마저 준다. 슬픔이 우아함을 넘어 산뜻할 수까지 있다니!
2악장 로망스의 서정이 두툼하다. 20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손끝에서 듣기 힘든 소리다. 김봄소리의 외모와 이름이 주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혹여 소녀풍의 로망스를 기대했다면, 들으면서 앨범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꽤 기대가 됐던 작품이다. 비에냐프스키야 능기로 삼는 곡이니 호기심을 충족하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돌아섰다면, 쇼스타코비치는 “으흠?”하고 귀를 열게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편하지 않은 협주곡.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관통하는 우울감, 분리된 자아, 서랍 속에 감춘 분노가 이 작품에도 어김없이 녹아 있다.
작곡자가 진즉에 완성했지만,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았던 작품. 이 걸작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고도 2년이나 지난 1955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와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고갈되고 마는 이 험한 작품을 김봄소리는 어떻게 연주했을까.
과연 1악장부터 다르다. ‘좋다’는 일단 보류한다. 지금은 ‘다르다’를 이야기하고 싶다.
1악장 모데라토는 ‘야상곡(녹턴)’. 물론 쇼팽의 야상곡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의 야상곡이다.
김봄소리의 야상곡을 들으며 떠올린 이미지가 있다. 좀 기괴한 풍경이다. 달이 어둑어둑 흩어진 구름 사이로 떠오른 밤, 방안에서 뱀파이어 철학자가 무채색의 깊은 한숨을 내쉰다.
상당히 뜬금없는 그림이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김봄소리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가 연주한 1악장은 교교한 달빛 아래 창백한 얼굴의 한 남자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3악장은 개인적으로 이 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장인 파사칼리아. 왜 좋아하는가 하면, 어쩐 일인지 이 악장은 마치 영화음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영화음악을 다수 쓴 작곡가인 이유도 있겠지만, 확실히 이 악장은 영화의 한 장면을 선연하게 그리게 한다.
그러니까 내게는 로마 검투사의 등장이다. 느린 저음선율의 시작이 그렇고, 후반의 기나긴 카덴차가 이를 더욱 부각시킨다.
김봄소리의 데뷔앨범은 20대 연주자의 데뷔앨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농숙한 연주를 담고 있었다. 놀랍도록 절제된 감정 안에서 최대한의 감동을 끌어내는 솜씨가 노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씩씩하고 감춤이 없어 활을 든 여전사의 느낌마저 주었다.
우는데, 울지 않는다.
타오르는데, 녹아내리지 않는다.
때때로 납덩이처럼 무거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뒤에서, 칼같이 날렵한 활 사이로 두 눈을 빛내고 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