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진영은 나이가 들면서 역할에 분량과 한계가 지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대신 영화 ‘흥부’에서처럼 “그 안에서 자유롭고 재미있게 연기하길 꿈꾼다”고 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권선징악, 궁극적으로 믿어야 할 희망
나이들수록 분량 적어지는 건 당연…깊이로 승부
“꿈과 희망은 얼마나 소중한가.”
배우 정진영은 꿈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저 멀리는 영화감독의 꿈을 품었던 10대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어떻게 사는 게 재미있는 삶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다. 그러면서 “꿈을 꾸는 게 중요한 것이지, 이룸은 그 관건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꿈 덕분에 오늘 할 일이 정해지면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정진영에게 매일 매일의 일상은 꿈 자체이기도 하다. 영화 촬영현장은 더욱 그렇다. 사극인 영화 ‘흥부’의 오픈세트 이곳저곳을 혼자 기웃거리며 산책하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는 그는 “배우와 스태프 등 동료들과 어울려 여관방에서 막걸리 한 잔 편히 나눌 수 있는, 재미있는 현장”을 역시 꿈꾼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있게 연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느냐”의 문제로도 연결되는데, 그런 점에서 ‘흥부’ 속 탐관오리라는, 선명한 악역의 다면적 매력에 대한 고민 역시 그에게는 “재미”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형적인 악역의 이미지를 지녔던 초기 시나리오 속 인물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 “탐욕스런 관료의 용의주도함과 욕망 앞에서 천박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흥부’에서의 정진영.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런 탐욕스러움과 천박함의 끝. 고전 ‘흥부전’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이야기를 꾸민 영화 ‘흥부’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 ‘권선징악’이다. 정진영은 이를 “궁극적으로 믿어야 할 희망”이라고 말했다.
“짧은 미래 안에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긴 미래는 그 방향으로 간다. 살아온 경험으로도 그렇다. 인간세상은 그렇게 살아왔다.”
정진영은 그렇게 삶의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듯했다.
“나는 스스로 대단히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진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배우로서 살아올 수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세상 경험치가 쌓이는데, 더 젊었을 때 모르던 느낌과 감정을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경험치를 타인 특히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대학생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칫 도움을 준답시고 뭔가 하는 얘기는 시대와 맞지 않고, 잔소리일 때가 많다”는 그는 “그것 자체가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아들이나 후배 등 젊은 타인을 모두 “개별적 인간으로 대하려 노력할 뿐이다”며 웃었다.
그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깔고 연기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나이가 들면서 “역할의 분량이 적어지는 건, 한계가 지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대신 그 안에서 “깊이 있게 표현하는 영역이 생겨난다”며 또 다른 길을 찾아가고 있다. “내가 더 자유롭게 살면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화 ‘흥부’의 정진영.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1000만 관객을 모은 출연작이 네 편이더라’며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그건 관객이 만들어낸 기적이다”면서 “배우가 흥행을 먼저 생각하고 기대하면 배신당한다. 기대했다 (흥행에)실패하면 작업했던 서너 달을 인생에서 지워낼 거냐?”며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그래서라도 그는 더욱 꿈을 놓지 않는다.
대체 그 꿈이 구체적으로 뭐냐고 물었다.
“내가 작게 나를 위해 작업할 수 있는 것, 나 혼자 떠나는 여행 같은 거다. 내가 감당할 정도면 꿀 수 있는 꿈 말이다.”
10대 시절 지녔던 꿈의 투명함을 말하는 그의 말에서 작은 힌트가 떠올랐다.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상기된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은 그렇게 꿈의 구체적인 모양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10대의 꿈이 새록새록 다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10대 시절의 투명함이 아련하다. 그 투명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청춘이 그리운 게 아니다. 그 투명함은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