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순간] 7. US오픈 16강 이형택 “샘프라스와 맞대결…가슴 떨려 잠 설쳤다”

입력 2018-10-1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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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택은 한국 테니스의 간판이자 자존심이었다. 사진은 1998년 제13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단식 결승 때 모습.

이형택은 한국 테니스의 간판이자 자존심이었다. 사진은 1998년 제13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단식 결승 때 모습.

요즘이야 테니스 하면 정현(22·한국체대)을 떠올리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테니스의 간판은 이형택(42)이었다. 그는 이슈를 몰고 다닌 한국의 자존심이었다. 2000년 US오픈 16강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03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에서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투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 8월에는 당시 한국 남자 최고 랭킹인 36위에 올랐다. 그해 US오픈에서 또 다시 16강에 진출했다. 빠른 발로 코트 전체를 누비며 세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선수로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그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덕분에 이런 화려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을 확신할 순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이나 태국, 일본 등 경쟁자가 많았다. 고비는 4강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2-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탔다. 일본을 만난 결승전은 오히려 쉬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역 문제는 민감해서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때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나의 테니스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테니스는 선수 개인이 국제대회를 찾아다니며 출전해야하는 종목이다.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2년 동안 마음 편히 외국 대회를 다니지 못한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테니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한번의 기회는 삼성그룹과의 만남이다. 후원을 통해 세계화를 지향한 삼성은 여자선수 박성희의 성공을 보면서 남자도 세계무대에 도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박성희는 프랑스오픈(1996년)과 호주오픈(1997년) 단식 16강에 올랐다. 여자단식 통산 최고 랭킹은 57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형택에게도 기회가 왔다. 삼성은 세계 100위권 진입을 목표로 과감하게 지원했다. 삼성증권에 입단한 그는 주원홍 감독을 만났다. 주 감독은 당장의 성적보다는 이형택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런 판단이 세계 일류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2000년 US오픈 16강 진출 때 이형택의 모습.

2000년 US오픈 16강 진출 때 이형택의 모습.


2000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해다. 그랜드슬램대회 첫 출전인 US오픈에서 16강에 진출했다. 한국남자 선수로는 최초다. 기적 같은 일에 한국 테니스계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면서 “아울러 삼성증권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더 극적인 건 16강 상대가 그랜드슬램 14승의 피트 샘프라스(미국)였다는 점이다. TV에서나 보던 세계 최고의 선수를 만났다.

“그때서야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간접 비교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전에는 샘프라스와 경기를 해본 선수가 내 주위에는 없었다. 그래서 내 수준이 궁금했다. 또 솔직히 겁도 났다. 단 한 게임도 따내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경기에서 망신당하지나 않을까봐 걱정했다. 당시 샘프라스는 지구상에서 테니스를 제일 잘 치는 선수였다. 그래서 경기 전날엔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을 못 이루고, 새벽까지 설쳤다.”

비록 0-3으로 지며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US오픈의 성과는 이형택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우리도 그랜드슬램 정상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이다.

지난 2006년 12월 8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테니스클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 결승에서 승리한 이형택(오른쪽)과 전웅선이 부둥켜안고 있다.

지난 2006년 12월 8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테니스클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 결승에서 승리한 이형택(오른쪽)과 전웅선이 부둥켜안고 있다.


이형택은 7년 뒤 다시 한번 US오픈 16강에 올랐다. 32강에서 앤디 머레이를 물리쳤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노장 취급을 받던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실력은 더 좋아졌다. 2007년은 성적과 상금 등 많은 면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해였다. 비록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2번이나 US오픈 16강에 오른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이형택은 2009년 현역 은퇴를 했다. 2013년 잠시 복귀했지만 사실상 유니폼을 벗은 시기다. 이후 그는 춘천에서 테니스아카데미를 열어 지도자생활을 했다. 2년 전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리미어 테니스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유학을 꿈꾸는 선수에게 운동과 공부의 기회를 동시에 주면서 프로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다. 그는 한국테니스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들려줬다.

사진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정현은 이형택(왼쪽)의 바통을 이어받아 한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거듭난 차세대 스타다.

사진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정현은 이형택(왼쪽)의 바통을 이어받아 한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거듭난 차세대 스타다.


“내 경우 어릴 때 주니어국제대회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보면 조금 더 일찍 경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나아갈 방향이 잡힌다. 그래서 후배들을 볼 때마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외국에 나가서 경험을 쌓으라고 한다. 국내에 안주해선 안 된다. 국가대표가 끝이 되어선 안 된다. 세계로 뻗어가야 한다. 테니스는 트레이닝 등 흐름이 빨리 바뀌는 종목이다. 그 트렌드를 따라 잡기 위해서라도 국제대회 경험을 쌓아야한다.”

그는 정현의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이제 후배들의 목표는 정현이 됐다. 우리도 그랜드슬램 4강(2018년 호주오픈 4강)까지 갈 수 있는 선수를 배출했다. 세계적인 선수와 맞붙어도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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