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가족, 악몽, 사주…KBO리그 선수들의 부적을 만나다

입력 2019-06-0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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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지지대가 필요한 프로 선수들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부적을 지니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의 헬멧에는 각종 타격 기술이 빼곡히 적혀 있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기술임에도 심기일전을 위해 새겨뒀다. 사진|스포츠동아DB·롯데 자이언츠

‘부적’은 민속신앙에서 처음 쓰인 말로,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글씨나 그림을 적어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를 의미한다. 하지만 신앙심과 별개로 누구에게나 심리적으로 기대는 문장, 기억, 사람 등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 역시도 부적으로 칭한다.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각자의 부적이 있다. 누군가는 책에서 읽은 글귀를 힘들 때 되새기며, 또 다른 누군가는 롤 모델의 말 한마디를 삶의 지표로 삼는다. 지칠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힘을 내는 이들은 물론, 최악의 순간을 부적으로 삼는 이도 있다.


● 모자챙에 빼곡한 자기암시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KBO리그 타자 가운데 헬멧이 가장 지저분(?)한 건 손아섭(31·롯데 자이언츠)일 것이다. 글귀로 가득한 손아섭의 헬멧은 빈틈을 찾을 수 없다. ‘뒷다리 70, 앞다리 30’, ‘오른쪽 어깨는 낮춰라’ 등 대부분 타격 기술에 관련된 이야기다. 극한의 긴장 속에서 매번 헬멧을 보고 심기일전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굳이 헬멧에 적지 않더라도 수천 번의 스윙으로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기본이다. 그러나 이렇게 빼곡히 적어둔 문장이 우연으로 눈에 스치기라도 하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설명이다.

삼성 라이온즈 원태인은 모자챙에 악몽 같던 2019년 3월 30일을 적었다. 야구인생 첫 피홈런을 평생 기억하겠다는 의미다. 사진|스포츠코리아·최익래 기자


원태인(19·삼성 라이온즈)의 부적은 야구인생 최악의 하루다. 올해 삼성의 1차지명을 받은 그는 첫 2경기에서 2.2이닝 무실점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3월 30일 대구 두산 베어스전 2-1로 앞선 9회 세이브 상황에 등판했으나 오재일에게 3점포를 얻어맞으며 패전투수가 됐다. 아마추어 시절을 포함한 원태인의 야구인생 공식경기 첫 피홈런이었다.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는 그에게 “이날을 절대 잊지 말라”고 주문했고 원태인은 모자챙 끝에 ‘2019.3.30’을 적었다. 은퇴할 때까지 그날을 기억하겠다고 누차 다짐했다. 원태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듯 야구인생 첫 피홈런의 아픔을 털고 올 시즌 삼성의 선발투수로 안착했다.

● 팬, 그리고 가족의 뜨거운 사랑

조성환 두산 베어스 수비코치는 현역시절 내내 롯데 유니폼만 입었고 팀이 2008년부터 5년 연속 가을야구 무대를 밟는 데 일조했다. 조 코치의 부적은 팬이다. 그는 “현역 시절에는 타석에서 팬들의 리듬까지 느껴졌다. 관중이 적게 온 날에는 어수선했고, 많은 날에는 전율이 느껴졌다”며 “결국 프로스포츠 선수에게는 팬이 부적이다. 코치가 된 후 선수들에게도 이를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팬들의 사랑이 무한하지는 않다. 극심한 부진에 빠졌거나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뒤 선수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상상 이상이다. 마치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린 기분이지만, 그럴 때 언제나 든든한 편이 되어주는 건 결국 가족이다.

박세혁(30·두산)은 아버지와 한솥밥을 먹는다. 집에서는 물론 ‘직장’인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박철우 두산 타격코치의 존재가 박세혁의 부적이다. 그는 “아버지와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적지 않나. 우리 가족에게 야구는 일종의 가업인 셈”이라며 “나보다 먼저 성공하셨고, 실패도 경험했던 분이 아버지다. 지칠 때 아버지를 보며 힘을 많이 얻는다”며 객쩍게 웃었다.

NC 박민우. 스포츠동아DB


● “나는 될 놈이다”…자신감은 최고의 부적

매순간 당당한 박민우(26·NC 다이노스)의 자신감은 어쩌면 타고난 것일지 모른다. 사주팔자를 중시했던 증조할머니의 영향으로 예정일보다 늦게 세상 빛을 봤다. 무속신앙에서는 그가 태어난 1993년 2월 6일을 ‘길일’로 여긴다고 한다. 박민우는 “어디서 사주를 보더라도 좋은 얘기만 들었다. 어머니가 예정일보다 며칠 더 나를 품어주신 덕에 타고난 사주팔자가 좋다. 늘 ‘나는 될 놈’이라고 되새긴다”고 밝혔다.

KBO리그 현역 최다승 투수 배영수(38·두산)의 부적은 ‘심장’이다. 배영수는 “마운드 위에서의 위기는 물론 선수 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위기까지 극복하는 비결은 결국 심장이다. 자신을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배짱과 심장이 내 부적이다. 그게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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