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흔들리는…’ 이재영 작가 “들꽃과 들풀에서 위로를”

입력 2020-08-23 1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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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이재영 작가

“물 흐르듯 흐르는 게 인생이죠. 어찌 흐르든, 무엇으로 흐르든, 거기에서도 꽃은 피잖아요. 그러니 너무 힘들지 않고, 괴롭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애초 ‘마음 비우기’란 가능한 것인가.

무탈하게 ‘서른 잔치’를 끝냈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뿌리도 내린 줄 알았다. 하지만 위태로움은 마흔의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경기도 가평에서 책방 ‘북유럽’을 운영하며 매거진, 웹진, 단행본 등 다양한 글을 쓰며 소소하지만 작은 행복을 누려왔다는 에세이스트 이재영(45).

이제는 중학생이 된, 일곱 살배기 딸아이와 함께한 여행의 감성과 에피소드를 통해 따스한 시선을 담아낸 첫 산문집 ‘예쁘다고 말해줄 걸 그랬어’ 그리고 2016년 ‘여행을 믿는다’에 이어 세 번째 작품 ‘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를 최근 내놓았다.

전작들에서 작가의 마음을 채워준 것은 서울 종로에서부터 저 멀리 스페인의 말라가에 이르기까지, ‘낯선 어딘가’라는 새로운 공간 그리고 거기서 얻는 행복이었을까.

사진제공 | 이재영 작가



○슬럼프…모든 게 끝인가 싶었던 ‘긴 터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섰던 그의 평화롭던 일상에, 하지만 작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에세이 작가로서뿐 아니라 구성작가로도 오랜 시간 일을 해오며 나름 성과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다 믿었던 때였다.

한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기로 했던 상대방이 더 이상 작업을 하지 못하겠다며 일방적 통보를 해왔다. 인생의 첫 거절이었을까, “이게 끝인가” 싶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슬럼프였어요. 10년 이상 해오던 일이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겠어요.(웃음) 설상가상으로 당시 출판계 불황이 맞물렸지만, 모든 게 제 탓으로만 여겨지더군요. 한마디로 폐인처럼 지냈죠.”

하릴없이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와 매일 산책하는 것으로 막힌 숨을 트고 지친 마음을 달랬다. 하루하루 산책길은 산란하고 침체했던 마음을 조금씩 다잡아주었다.

그러는 사이, 무심코 지나쳐왔던 동네 골목 골목길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눈에 박히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의 발치와 구석구석에서 피어나고 자라난 들꽃과 들풀들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클로버, 강아지풀, 패랭이꽃 따위들 사이에서 고마리, 왕고들빼기꽃, 유홍초, 메꽃, 흰독말풀, 갯까치수염 등 아직 낯선 이름의 꽃과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결코 화려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아무도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지만, 들꽃과 들풀들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뿌리 내린 채 무던히도 제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음을 불현듯 알아챘다.

“(가평)동네에서 살아온 지 7년이 조금 넘었는데 처음 본 광경들이었어요. 바쁘게 살다보니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들꽃과 들풀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관심을 갖다보니 감정이입을 하게 됐죠. 사계절을 똑같이 견디며 뽑혀도 다시 자라나고, ‘사는 게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나만의 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만했던 마음도 없어지고, 저를 더 알게 됐다고 할까요. 사람이 계속 좋을 수만 없고, 그렇다고 나쁠 수만도 없다는 게 인생의 이치(?)라는 걸 깨달았어요.(웃음)”

풀들 사이에서 물기를 머금고 피어나는 고마리를 바라보며 작가는 “인생이 어디로, 무엇으로 흐르든, 거기에서도 꽃은 피어난다”고 생각했다. 아이보리톤의 우아함을 거만하게 과시하는 왕고들빼기꽃에 프리랜서 작가로서 겪는 일상을 대입시킨다. 달개비꽃의 담쟁이처럼 비록 느린 걸음걸이라도 인생의 담벼락을 채워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속도로 또 다시 자라날 것임을 작가는 믿고 있다. 신작의 부제 ‘산책길 들풀의 위로’야말로 그 다짐의 시작인 셈이다.

사진제공 | 이재영 작가



○들풀과 들꽃…사랑하는 딸, 그리고 방탄소년단

산란하고 침체했던 3년의 시간. 들풀과 들꽃이 피어나고 사그라지기를 반복한 세 번의 순환하는 사계절을 지켜보며 작가는 비로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집밖에 피어나 함께 어우러지며 흔들리는 들풀과 들꽃이 작가는 한 없이 고맙고, 고맙다.

‘오늘도 흔들리는’ 작가에게 위로를 준 이는 또 있다.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딸이다. 딸은 일곱 살 때부터 엄마의 손을 잡고 길고 짧은 여행을 함께해왔다.

“생각이 깊은 친구에요. 하루는 제가 굉장히 힘들어하니까 ‘엄마, 편하게 생각 하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저의 생각, 감정 등을 알려줬더니 표정을 보면서 그렇게 말해주더라고요. 집에 TV도 없고, 최신 기종의 휴대전화도 못쓰게 하는 엄마지만, 그런 엄마를 이해해주는 한결 같은 딸, 효녀에요.”

두 모녀가 길고 짧은 여행길에 나섰던 것처럼 이들은 그룹 방탄소년단을 바라보며 또 다른 일상적 공감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재영 작가는 아직 폴더 폰을 쓰는 딸아이에게 방탄소년단의 동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스마트 폰을 내주기 시작했다. 대부분 그렇듯, 자신 역시 흠뻑 빠져들었다.

“슬럼프 탈출에 큰 도움이 됐죠. 하하하! 딸이 학교에 가고 나면 조금 무기력해지더라고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딸과 보던 유튜브를 보게 되더라고요.”

방탄소년단, 특히 리더 RM이 건네는 메시지에서도 쉽게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마치 자신에게 주는 또 다른 위로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그가 ‘그만 일어나세요. 힘을 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남준의 믹스테이프와 그가 추천하는 책, 모두 찾아보고 읽어봤죠. 그들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잖아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간을 버티고 스스로 일어났던 것처럼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게 방탄소년단이 가진 힘 같아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간을 버티고 스스로 일어난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미 무수한 들꽃과 들풀은 그렇게 피어나며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 나를 규정하지 말고, ‘나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어떤 성과나 성취가 있어야 잘 사는 게 아니라 밥 잘 먹고, 편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타인과 비교해서 잘못됐다고 자책하지 말고, 편안하게 말이죠.”

이미 무수히 많은 들꽃과 들풀이 그렇게 ‘오늘도 흔들리고’ 있지만 또 그렇게 피어나며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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