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음반] 재즈계의 아이돌에서 절망과 고독의 예술가로 … 쳇 베이커의 시작과 끝

입력 2021-01-08 18: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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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쳇 베이커의 시작과 끝을 담은 LP, CD 4종 출시
- ‘재즈계의 제임스 딘’에서 사망 직전 최후의 명연까지
그가 트럼펫을 불고 노래를 읊조리면 순식간에 나른한 우울감이 물잔 속의 잉크 한 방울처럼 번져나갔다.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쿨 재즈의 아이콘. 쳇 베이커의 시작과 끝을 담은 LP와 CD 4종이 출시됐다.

누가 더 숨 막히도록 연주를 잘하는지, 누가 더 빼어나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마치 무림의 고수들이 천하쟁패를 위해 격돌하는 듯한 재즈라는 장르에서도 ‘아이돌 스타’가 존재한다면 그 중심에는 단연 ‘쳇 베이커’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렸던 쳇 베이커. 소년 같은 보이스, 어딘지 모르게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젊은 날의 그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한창 인기였던 1950년 대 재즈계에서 단연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트럼펫도 독학으로 시작했던 그는 지금까지 많은 연주자와 비교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쳇 베이커만의 느슨하면서도 울적한 트럼펫 소리는 오직 그만이 연주할 수 있는 트레이드마크이다.

트럼펫 연주와 더불어 어눌한 듯 중성적인 목소리가 큰 매력이었던 그는 1954년 ‘Chet Baker Sings’를 발매해 높은 앨범 판매량을 보이는 한편 여성 팬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리즈시절’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 새롭게 발매된 LP와 CD는 그의 전성기와 최고의 걸작을 고스란히 담아낸 음반이다.
전성기 시절의 노래와 연주를 담은 Chet Baker ¤ IGORT (3LP Box Set)에는 쳇 베이커를 대표하는 ‘My Funny Valentine’, ‘I Fall In Love Too Easily’, ‘But Not For Me’ 등 38곡과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이고르트가 쳇 베이커 삶을 그린 22쪽의 일러스트가 실려 있다.

젊은 쳇 베이커가 긴 전성기를 누리지 못한 데에는 백인이 연주하는 재즈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약이었다.


쳇 베이커는 마약에 빠진 채 미국과 유럽 일대를 떠돌게 된다. 레코딩은 계속 했지만 마약을 사기 위한 돈벌이 수단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의 존재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쳇 베이커의 젊은 시절을 본 사람이라면 앨범 재킷 속의 쭈글쭈글한 늙은이가 그라는 사실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한때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많은 여성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그는 이 앨범을 끝내고 15일 후 투신자살하고 만다.

이 앨범은 1988년 마지막 콘서트 레코딩으로, 그가 평소 좋아하던 곡들로 채워져 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는 이빨 사이로 새어나가는 느낌이 역력하다. 원래 테크니션이 아니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가 재즈를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도 이 앨범은 절창 중의 절창이다.

젊은 시절의 쳇 베이커가 ‘MY FUNNY VALENTINE’을 꿈꾸듯이 낭만적으로 해석했다면, 이 앨범의 ‘MY FUNNY VALENTINE’은 오직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는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고독한 예술가의 크로키. 쳇 베이커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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