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일선 학교에서, 방송국에서, 연구소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우리 어문에 관한 연구와 말 가르치는 일을 평생 해 온 국어교육학자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가 산문집 《짐작》(도서출판 소락원)을 출간했다. 그는 ‘국제 PEN 한국본부’ 의 수필 작가로서 부드러우면서도 감화력 있는 에세이를 써 오기도 했다.
‘너그러움과 헤아림을 품는 언어’라는 부제를 단 이 책 《짐작》은 언어생활에 스며 있는 삶의 철학적 화두들을 불러오면서, 인간 탐구의 차원으로 우리의 사유를 끌어 올린다. 책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은 글쓴이의 경험적 예화들이 산뜻한 재미와 감동을 풀어놓는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내는 구체적인 활동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일단 언어이다. 일의 성패도 말에 달려 있기 일쑤다. 말이 말의 역할을 못 하고 주저앉으면 될 일이 없다. 이런 말들은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 살면서 관계를 풍성하고 복되게 만들어 가는 것도 언어가 주는 복이다.
박인기교수의 설명에서 이 책의 인문학적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말은 없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쓰고 다니는지는 내가 하는 말에서 다 나타난다. 나쁜 마음은 나쁜 언어를 입에서 내보내고, 좋은 마음은 좋은 언어를 입에서 내보낸다. 사람의 말이야말로 그 사람 마음의 밭[心田], 그 사람 마음의 생태에 피어나는 풀꽃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바람직한 생태와 인문 가치에 잘 맞물리는 우리들 말과 마음을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 이를 살피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과 손해를 말 자체로 감당하려는 세상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무도한 언어 타락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유정하가 그지없고, 말의 의미는 무한하기 그지없다. 말에 온도가 있고, 향기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 말에 배어 있는 온도나 향기는 사실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향기가 나게 잘하기란 어렵다.
말과 마음이 조화롭게 서로를 끌어 올려 우리의 정신을 성숙으로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말의 길을 따라 마음이 따라온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어와 인간의 참모습에 눈을 뜨고, 인문학적 지혜에 눈을 뜨는 사람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일상에서 조금씩 모자라게 언어를 사용한다. 내 감정 따라 내 욕구 따라 내 손해만 생각하고 상대에게 모진 말을 한다. 그래 놓고 나니, 뭔가 찜찜하다. 아니, 이게 최선은 아닌데, 어디서 잘못되었나. 언어에 대한 각성의 힘은 왜 이렇게 사후에 솟아나는가.
이런 일도 있다. 내 판단과 내 가치가 합당하므로 상대의 오류를 심하게 몰아붙였다. 그랬는데 속이 시원해야 할 텐데, 마음이 편치 않다. 아! 나는 왜 이런 수준의 인간밖에 못 되는가. 곧고 바르게 말한다고 해서 다 적절한 언어가 되지는 않는구나. 어렴풋이 깨닫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헤아려 주는 언어에 그제야 눈을 뜨는 것이다.
이런 성숙하지 못한 언어수행은 어른이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말을 듣지 않고 떼쓰는 자녀를 아침 식탁에서부터 눈물 빠지게 야단을 친다. 아이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그런 뒤에야, 각성이 따라온다. 내 안의 너그럽고 멋있는 아버지는 어디로 가 있었단 말인가.
언어든 마음이든 성찰을 딛고 성숙한다. 그 성찰의 다채로운 단서들을 이 책은 제공한다.
저자는 서울대 사범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으로 교육학박사를 받았다. EBS 프로듀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 경인교육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한국독서학회 회장, 교육부 교육과정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재외동포청 정첵자문위원장, 한국독서학회 고문, (사)유리시아문화포럼 이사, 한우리독서문화운동 본부 이사, 상록수나눔재단 이사, 학교법인 송설당 교육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으며, ‘김천연구 콜로키움’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교육론》 《문학교육과정의 구조와 이론》 《국어교육과 미디어 텍스트》 《국어과 창의·인성 교육》 《스토리텔링과 수업기술》 《한국인의 말, 한국인의 문화》 《교과는 진화하는가》 《다문화 현상의 인문학적 탐구》 《지구촌 한글학교 스토리(공편)》 등의 학술서와 《언어적 인간 인간적 언어》 《송정의 환(幻)》 등의 산문집도 펴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