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팔팔 끓는 살조개 칼국수에 꽁꽁 언 몸 사르르…

입력 2011-01-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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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장도로를 찾다 구매항 부근 야산과 갯바위를 헤맨 탓에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식당을 만나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미각을 찾는 여행은 장마다 꼴뚜기는 아니지만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뜻밖의 별미를 만나기도 한다. 안면도 77번지방도 장곡리 부근에서 추위에 쫓겨 무작정 들어간 식당(중앙가든)의 살조개 칼국수가 그러했다. 대장 허영만 화백이 대원들에게 칼국수를 떠주고 있다.

5.안면도∼광천<상>
“기다려야 소용없어. 오늘 배 안 떠. 그쪽 선착장 시설이 시원치 않아서 바람이 센 날엔 배를 댈 수가 없거든.”

배 떠날 시각이 다 되어가는데 어찌 된 셈인지 영목항 여객선 매표소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 잠긴 문을 바라보며 난감해하는 우리에게 구멍가게 할머니가 안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2011년 1월 15일, 오전 9시 10분 안면도 영목항발 원산도행 여객선은 결항이었다. 여객선의 발을 묶은 것은 새벽 3시를 기해 내려진 풍랑주의보. 배를 타고 원산도로 들어가 섬을 일주한 뒤 다시 안면도로 돌아와 남쪽 끝에서부터 태안 쪽으로 훑어 올라가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꼬였다.


“오늘 배 안떠”
풍랑에 졸지에 부두서 길 잃고
선창 백반집서 만난 ‘귀인’
소형어선에 자전거 싣고 출발

병풍같은 오봉산해수욕장 지나
외딴 폐가서 따뜻한 차 한잔
어느새 따라온 섬 개 한마리
선착장 까지 에스코트


영목항에서 원산도까지는 2km가 채 안 되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지만 삭풍에 몸부림치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원산도와 영목항 사이의 바다는 장고도, 고대도, 삽시도 등 주변 섬들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얌전한 내해(內海)지만 이날 초속 12m의 북서풍에 백파가 일고 있었다.

우리는 졸지에 바람 찬 부두에서 길을 잃었다. 올겨울 최악의 한파라는 일기예보를 실감케 하는 지독한 추위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콧속이 쩍쩍 얼어붙는다.

원산도로 건너가는 어선의 비좁은 조타실. 실내가 너무 좁아 처음엔 몇명이 갑판에 나가 있었으나 영하 14도(체감온도 영하 25도)의 추위와 들이치는 바닷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조타실로 들어오고 말았다.


원산도 오봉산해변을 질주중인 자전거 식객들. 바닷가쪽 모래밭이 꽁꽁 얼어 바퀴가 빠지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건너편에 삽시도가 보인다.



# 혹한 영목항의 풍랑도 자전거 ‘집단가출’ 열기는 못 막아

허영만 화백의 3번째 장거리 집단가출 프로젝트인 자전거 해안선 전국 일주는 지난해 마무리한 영해 외곽선 요트 일주항해와 맥이 닿아있다.

허영만 선장과 함께 전국 일주 요트 항해 중이던 2009년 여름, 집단가출호는 대한민국 영해의 서쪽 끝 격렬비열도를 거쳐 보령 오천항으로 들어갔다가 삽시도를 왼쪽에 끼고 안면도 남단을 돌 때 멀리 원산도가 보였었다. 자전거 전국일주 코스에 굳이 원산도를 넣은 것은 집단가출호 항해 당시 원산도 남쪽 해안의 모래해변이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추위도 피할 겸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선창의 백반집으로 들어서자 주방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지독한 추위에 때아닌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우리의처지를 바꿔놓고 봐도 정상은 아닐듯하다.

굴을 듬뿍 넣고 끓인 콩나물국밥이 식탁에 나왔을 때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중년의 어부가 원산도로 가려다 발이 묶였다는 얘길 듣더니 해결해주겠다고 나선다.

여객선은 못 가는 상황이라도 추진력이 좋은 소형 어선은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이웃 어부가 통발을 살펴보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OK 사인을 보낸다.

자전거 나그네들은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가야 할 길이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눈보라가 몰아쳐도 곰비임비 바퀴를 굴려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멤버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오늘은 추위가 극심하니 그냥 쉬자’고 했다면 못 이기는 채 주저앉기 십상인 상황이지만 자전거 전국 일주를 목표로 집단가출한 ‘철없는 어른들’ 중 누구도 포기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최연장자인 허영만 대장이 먼저 나가 신발끈을 동여매는 데야 별수가 없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친 뒤 ‘이 추운데 자전거를 끌고 어딜 가느냐, 제 정신이냐?’는 주방 아주머니들의 살가운 만류를 뒤로한 채 선창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어선에 자전거를 실었다. 뱃전에 부딪힌 파도가 깨지며 갑판으로 쏟아져 자전거와 사람이 구별 없이 짠물 세례를 받았고 바닷물에 젖은 자전거에는 삽시간에 얼음 더께가 쌓여갔다. 체인이 얼고, 변속기 뭉치에도 얼음이 두껍게 끼어버렸다. 만일 뱃길이 길었다면 갑판에 얼어붙은 자전거를 망치로 깨서 빼내야 했을 것이었다.

원산도 선착장에 도착해 돌아오는 요금까지 왕복 뱃삯을 건네려 하자 선장은 심드렁한 말투로 “뱃삯은 왕복하는 값을 받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는 얘기가 아니고 바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중에 데리러 올 수가 없어서 오는 뱃삯을 미리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 안에 원산도에서 다시 나올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는 얘기.

우리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멀어지는 어선을 멍하니 쳐다보다 씩씩하게 자전거에 올라탔으나 자전거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바닷물이 튀어 얼어버린 체인은 몇 번의 페달링으로 얼음이 부서지며 제거되었으나 변속기와 브레이크가 문제였다. 특히 유압시스템인 브레이크는 파이프 안의 브레이크오일이 낮은 기온에 점도가 높아진데다 디스크에 얼음이 붙어 제동 성능이 크게 떨어졌다.


# 고즈넉한 원산도 일주서 만난 강아지의 남다른 사연

여객선이 끊긴 섬은 인적이 없어 무인도처럼 적막했다. 위성지도로 확인했을 때는 초전마을 서쪽의 갯바위 구간을 몇 개 지나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밀물이 들어와 갯바위 중간까지 찰랑찰랑 차올라와 있었으므로 불가능.

마을을 통과해 오봉산 해수욕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랑들 너머에 있는 오봉산해수욕장은 원산도 남쪽 해안에 있는 3개의 모래 해변 중 가장 서쪽에 있는 곳으로 모래색이 희고, 입자가 곱기로 유명한 곳이다.

텅 빈 겨울 해변은 쓸쓸하고도 아름다웠다.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 높게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옛날 이발소에 흔히 걸려 있던 그림이 연상되는 전형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도와 백사장이 만나는 곳은 주먹만 한 얼음들이 굴러다닌다. 마른 모래에서는 바퀴가 푹푹 빠졌지만 젖은 곳은 얼어붙어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자전거로 달리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비록 모진 추위 속이었지만 멀리 삽시도를 바라보며 모래 해변에 바퀴자국을 내며 달리는 기분은 꽤 상쾌했다.

해변 길이가 2km를 웃도는 원산해수욕장까지 바퀴 자국을 찍고 나자 바람은 더욱 세졌다. 버려져 폐가가 된 판잣집 하나를 발견해 마당에서 스토브를 피우고 차를 끓였다. 춥고 바람 거센 날, 폐가의 양지바른 담벼락을 등지고 서서 마시는 뜨거운 차 한 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낭만이자 위안이었다.

고른쟁이골까지 진출한 뒤 전화로 배를 부르고 선착장으로 돌아가는데 마을 어귀부터 한두 살 먹었음 직한 강아지 한 마리가 낯선 우리 뒤를 따라붙는다.

처음엔 호기심에 적당히 따라오다 돌아가겠거니 했으나 이 녀석, 좀체 돌아갈 생각을 하지않고 쫄래쫄래 자전거 행렬의 꽁무니를 끈질기게 따라오더니 점촌마을부터는 아예 앞장을 서서 선착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눈보라를 뚫고 오늘도 달린다.  눈이 올 것에 대비해 2.35인치 광폭 타이어를 장착해 눈길에서도 크게 미끄럽지는 않았으나 맞바람을 뚫고 달리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날 저문다, 뜨자” 다시 눈보라 속으로…


77번도로 들어서자 ‘화이트 아웃’
눈보라 피해 무작정 들어간 식당
이게 웬걸? 살조개 푸짐한 칼국수
따뜻한 국물에 언몸이 풀리고…

초인적인 의지로 자전거 오르자
장곡리 고갯마루 냉이 캐는 할머니
한 입 씹으니 싱그러운 자연 향기가…


원산도는 선착장이 서너 개 있고 물때에 따라 사용하는 곳이 달라지는데 강아지는 지금 우리가 갈 선착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섬 개 삼년이면 물때를 아는 모양.

선장에게 강아지에 관해 물어보니 과연 사연이 있긴 있었다. 지난여름 해수욕장에 놀러 온 사람이 데리고 온 녀석인데 버려졌는지, 잊고 갔는지 주인은 떠나고 강아지만 섬에 남았고 그때 이후 섬에 사는 강아지는 섬주민들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여행객 차림의 외지인들은 잘 따른다는 것이다.

눈보라속에서 냉이를 캐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의 호미끝 걸려나오는 냉이를 통해 비록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으나 봄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는 자연의 섭리를 본다.



# 눈보라 속 라이딩서 만난 뜻밖의 작품, 조개칼국수

원산도를 떠나 영목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식간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며 낮은 구름이 깔리더니 안면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7번 지방도에 들어서자 기어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서 바람은 더욱 거세져 오후 2시쯤 눈보라는 절정을 이뤘다.

앞이 안 보이는 화이트 아웃 상황. 스키 고글을 가져오지 않은 대원들은 눈보라가 안구에 부딪히는 탓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글이 없는 대원들은 고글을 착용한 대원의 등 뒤에 숨어 달렸다.

눈보라 속의 라이딩은 추위도 고통스러웠으나 제일 큰 적은 바람 자체였다. 안면도는 섬 전체가 야산과 구릉으로 이뤄져 있어 고갯길이 많은데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내리막길에서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멈출 지경이었다.

횡풍이 불 때면 자전거와 몸이 함께 옆으로 밀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 그렇잖아도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에서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워 밸런스 유지에 집중해야 했다. 게다가 칼바람은 두툼한 스키 장갑의 봉제선을 뚫고 들어와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

신발이 부실한 대원들은 발이 얼어 고통을 호소했다. 이러다간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는 판단에 눈보라도 피할 겸 길옆에 보이는 첫 식당으로 무조건 들어갔다.

눈보라를 피해 무작정 찾은 식당이므로 음식에 대한 큰 기대 없이 뜨끈하게 몸이나 데우고 가자는 뜻에서 조개칼국수를 주문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온 이 집 칼국수는 뜻밖에도 작품이었다.

보통 해안 지역의 조개칼국수는 예외 없이 바지락을 쓰는데 이 집은 살조개를 쓴 것이다. 살조개는 꼬막과 백합을 반반씩 닮은, 바지락보다 좀 더 큰 조개로 서해 중북부해안에서만 나는 특산품이다. 전남 보성, 벌교에서 겨울 꼬막을 최고로 치듯 서산 태안에서는 살조개가 으뜸. 살조개로 국물을 내고 불 위에 얹어 끓는 채로 먹는 살조개 칼국수에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이른 아침부터 원산도 일주 라이딩에 눈보라 속을 뚫고 달린 몸에 온기가 돌자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이대로 식당 바닥에 누우면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목적지인 안면읍 정당리까지는 약 15km가 더 남았고, 여기서 더는 지체하다가는 날이 저물어 눈보라 속에서 야간 라이딩을 하게 될 판이었다.

식당의 뜨끈한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자전거에 올라타는 데는 그야말로 초인적 의지가 필요했다. 장곡리 고개를 넘을 때 고갯마루 한쪽의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 눈보라 속에서 밭이라도 매는 건가?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호미질을 하는 사람은 60대 할머니. 할머니가 캐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봄나물의 대표격인 냉이였다.

냉이밭 일부에 비닐을 씌워두면 땅이 얼지 않아 겨울 냉이를 출하할 수 있는데 할머니는 오전에 장에 다녀오는 바람에 일이 늦어져 눈보라가 치는 궂은 날이지만 일단 비닐을 벗겨둔 부분은 오늘 안에 다 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호미 끝에 걸려 나오는 냉이는 이 추위 속에서도 잎사귀가 파랗게 살아 있었다. 뿌리를 씹어보니 알싸한 냉이향이 입안 가득 싱그럽게 퍼진다.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인가 보다. 겨울이 온통 세상을 지배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명을 따뜻하게 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안면도의 냉이는 언뜻 매우 잔혹하게 보이지만 압도하되 완전히 짓밟지 않고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또 때가 되면 자리를 내주며 순환하는 계절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moto14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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