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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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아 이승미 기자] 역사의 배후에서 어린 왕을 사지로 몰았던 권력의 공기가 장항준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 유지태의 카리스마를 만나 스크린에 재구축됐다. 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유배된 단종의 삶을 기록 너머의 따뜻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사극이다. 영화는 승자의 기록이 지운 인간적 유대와 날 선 긴장감을 웰메이드 프로덕션으로 복원했다.

사극으로 저력을 확장해 비극 속 희망을 찾아낸 장 감독, 한명회 역을 맡아 침묵만으로 공기를 얼린 유지태는 이번 작품에서 연출과 연기의 정교한 합을 선보인다.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빚어낸 두 사람은 이 영화가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어린 왕 단종을 관객의 가슴에 오롯이 새겨줄 작품이 되길 바랐다.

O“테이프 붙여서 날선 눈매 만들어”

유지태는 그간 대중매체가 소비해 온 전형적인 한명회의 틀을 깨기 위해 집요한 분석 과정을 거쳤다. 고서에 기록된 한명회의 묘사를 AI에 입력해 이미지를 생성해보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하려 했다.

“실제로는 기골이 장대했다는 고서 기록에 따라 전작 ‘비질란테’ 촬영을 위해 100kg까지 증량했던 몸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어요. 또 제 눈매가 처진 편이라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머리 뒷부분을 테이핑으로 당겨 눈매를 올리기도 했어요.”

압도적인 피지컬과 특유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판을 설계하는 지능형 빌런을 자주 맡아온 그는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늘 화기애애했던 ‘단종 무리’와 달리 홀로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저는 너무 외로웠는데 다들 현장이 너무 행복했다고 추억하더라”며 웃었다.

“이런 캐릭터를 맡으면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어요. 한번은 장항준 감독도 제게 ‘너 외롭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낸 빌런 캐릭터들이 큰 사랑을 받는다면 행복한 일이죠. 제 대표 캐릭터인 ‘올드보이’의 우진은 해외 유명 매체가 선정한 전 세계 최고의 빌런 30인 명단에 16위로 오르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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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유해진 섹시함 있어, 멜로 보고파”

단종 역을 맡아 한명회라는 거대한 벽과 맞서야 했던 후배 박지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지태는 겁박하는 연기보다는 ‘아우라’를 만드는 데 집중하며 단종과 그를 지키려는 촌장 엄흥도(유해진)가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악의 축’으로 세웠다고 했다.

“(박)지훈이는 첫 인상은 굉장히 진지하고 신중했어요. 촬영 전 ‘이번 영화는 너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해줬죠. 작품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 보는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죠. 대사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기운을 드러내는 것인데 지훈이는 그걸 해낼 줄 아는 배우였어요.”

‘주유소 습격 사건’(1999) 이후 27년 만에 한 작품에서 재회한 유해진에 대해서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함께한 세대로서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소회를 전했다.

“(유)해진 형에게는 아직 제대로 보여지지 않은 ‘섹시함’이 있어요. ‘이끼’에서 보여준 비열함과 우리 영화 속 순수함을 오가는 묘한 매력이죠. 그 섹시함 때문에 예전에 제작을 준비하던 멜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해진이 형에게 건넨 적도 있어요.”

독립극장 기부 및 독립영화 응원 상영회 등을 통해 꾸준히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해 힘써온 그는,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OTT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지만 한국 영화의 핵심은 결국 작가 정신이 살아 있는 독립영화에 있다고 믿어요. 좋은 영화가 묻히지 않도록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이승미 기자 s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