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드뮤지컬컴퍼니 제공

오차드뮤지컬컴퍼니 제공



총성과 침묵 사이, 잊지 못할 약속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상흔이 남긴 세월 속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그 날’을 찾고 있었다.

오차드뮤지컬컴퍼니가 선보이는 2025년 신작 창작 뮤지컬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가 10월 10일 극장 온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작품은 ‘홍련’으로 제9회 한국뮤지컬어워즈(400석 미만) 작품상을 수상한 배시현 작가와 섬세한 감각으로 주목받는 신예 강철 작곡가가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이들은 ‘기억’과 ‘책임’, ‘남겨진 자들의 삶’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중심에 두고, 전쟁과 분단의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개인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직조했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잊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극은 1961년 4월 19일, 거리로 나선 대학생 ‘우현’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전쟁 중 흔적도 없이 사라진 큰형 ‘희택’을 찾던 그는 어느 날 ‘양민 학살 유족회’ 청년 위원장 ‘인경’을 만나면서 감춰진 가족의 비밀과 국가가 묻어버린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인경은 “왜 이들의 삶은 기록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며, 관객을 ‘기억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무대는 개인의 상처에서 시작해 집단적 침묵으로 확장된다. 배우들의 육성과 합창, 음악은 억눌린 기억의 조각들을 되살리며, 관객은 방관자가 아닌 ‘증인’으로서 무대의 중심에 선다. 작품은 잊힌 목소리를 되살려 오늘의 언어로 건네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 울림을 남긴다.

배시현 작가의 치밀한 서사와 강철 작곡가의 서정적 선율은 작품의 감동을 두껍게 한다. 섬세한 피아노 선율과 웅장한 합창이 교차하며, 인간의 존엄과 망각의 고통을 동시에 포착한다. 전쟁의 후유증, 가족의 해체, 그리고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상처의 흔적들이 감정의 파동으로 이어진다.

‘이우현’ 역은 이선우, 임태현, 조성태가 맡았다. 밝은 겉모습 아래 형에 대한 그리움과 생존의 본능을 품은 청년 우현을 세 배우는 각자의 개성으로 풀어낸다. ‘류인경’ 역에는 최태이, 장보람, 윤지우가 이름을 올렸다. 정의감과 냉철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기록되지 않은 죽음을 복원하며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지닌 ‘이윤섭’ 역은 임강성, 김대웅, 황두현이, 가족의 중심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서주희’ 역은 이은율, 류비가 맡았다. 극의 감정적 완급을 조율하는 ‘황종욱’ 역은 전흥선, 나재엽이 연기한다.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묻혀 있던 목소리들을 무대 위로 소환하며 ‘기억해야 하는가, 잊어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놓는다. 잊힌 이름들을 불러내는 이 작품은 단지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오늘의 우리에게 ‘기억의 윤리’를 묻고 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