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아닌, 마음으로 걸은 800km’ 손미나의 엘 카미노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13]

입력 2023-03-27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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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카미노(El Camino). 스페인어로 길.
손미나 작가가 제작과 감독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엘 카미노’의 시사회를 다녀왔습니다.
손미나 작가와는 인연이 꽤 오래 되었습니다. KBS를 사직하고 여행작가가 되어 두 번째 책을 냈을 즈음이었을까요. 서울대에서 특강을 마친 손 작가와 인터뷰를 했던 것이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행자의 자유로움과 방송인으로서의 말끔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반반씩 섞인 분위기였지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작가로(여행기뿐만 아니라 소설도 썼습니다), 방송인으로, 사업가로 정말 탈인간급 활동을 해오고 있는 손미나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러주고 있는데, 고마우면서도 쑥스럽습니다.

‘엘 카미노’는 손미나라는 사람이 저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걸은 여정을 진솔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손 작가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라는 두 개의 이름을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시사회는 압구정동 CGV에서 열렸습니다. 상영관이 있는 지하 2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 있더군요.

온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버텨라. 내 몸아’하고 갔는데 극장 특유의 분위기, 사람들의 후끈한 열기, 고소한 팝콘 냄새를 맡고 있자니 눈이 반짝반짝해집니다(벽에 붙은 광고지의 순후추 팝콘은 어떤 맛이려나요).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손미나 작가가 무대인사를 위해 등장했습니다. “감독이라는 호칭이 너무 어색하다”던 손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3년을 버티는 기간 동안 느낀 것들이 있었고, 결론은 산티아고였다. 정말 힘들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잘 했고, 중요했던 경험”이라며 “큰 화면을 통해 저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800km는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거리죠. 워낙 유명해진 길이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km라는 길은 여전히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상상했던 것처럼 잔잔하고, 솔직합니다.
영화 속에서 손미나 작가가 만난 한 여행자가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회사, 일,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인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토록 힘든) 이 길을 다시 걷게 만드는 이유일 겁니다.”

발이 부르트고, 갈라지고, 허벅지가 팽창하고, 폐가 터져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 여행자들은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를 화두처럼 붙들며 걷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과연 내가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를 물으며 나아갑니다.

마침내 800km가 끝나는 곳.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이 마침표를 찍는 지점을 얼마 안 남겨두고 많은 여행자들이 눈물을 쏟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아, 드디어 끝났다.”
“이제 해방이다.”
“결국 내가 해내고 말았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행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더 이상 걸을 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가슴 터지도록 슬퍼 여행자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손미나 작가는 영화 속에서 “이 길은 결국 마음으로 걷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여행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부터 손 작가는 자주 울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많은 여행자들은 이 길을 걷는 이유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뭉쳐진 마음을 풀고 화해하게 되었다는 벨기에 여행자, 한쪽 눈을 실명했기에 남은 한쪽의 눈으로 세상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산티아고를 찾았다는 프랑스 여행자, 순례길의 십자가에 죽은 아들의 사진을 못 박으며 오열하던 독일 여행자.
사람들은 포옹하고, “부엔 카미노”로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졌습니다.


오래도록 길을 걷는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 영화 속에 답이 있을까요.
처음엔 산티아고 순례길의 아름답고 장대한 풍광에 눈을 빼앗기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람이 먼저 보이기 시작합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 왔다가, 무엇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손미나 작가의 말이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그는 무엇을, 얼마나 그곳에 남겨두고 왔을까요.
언젠가 그가 걸은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거기에 버려둘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걸을 수 있을까요.

손미나 감독의 ‘엘 카미노’는 3월 29일 전국 주요 극장에서 개봉합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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