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사직구장으로 향하는 길. 운전대를 잡은 부산의 택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제 억수로 기분이 좋아서 나 혼자 축하주 한 잔 했다 아입니꺼.”
그가 마신 ‘축하주’는 바로 롯데와 부산을 위한 것이었다. ‘거인 중의 거인’ 손민한(33)이 전날 1년 총액 15억원에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맺고 롯데 잔류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전국구 에이스’의 탄생을 자랑스러워 한 부산 팬들은 언제부턴가 그를 ‘민한신’이라 부르며 열광했고, 롯데 관계자는 “손민한이 선발 등판하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많은 관중이 몰려든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택시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년에도 야구장 갈 맛 나겠네예”라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처음부터 내 갈 길은 롯데 뿐”
누구보다 홀가분한 건 바로 손민한 자신. 사직구장 그라운드에 선 그는 힘겨웠던 협상을 끝낸 덕분인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해 보였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FA 협상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구단과의 첫 만남 때부터 계약하는 그 순간까지 내 마음은 하나였다. ‘롯데에 남고 싶다’는 것.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졌을 뿐 계약은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었다.”
뜻밖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사실 FA를 신청한 선수들 중에 가장 먼저 계약하고 싶다는 뜻을 구단에 전달했었다”는 귀띔. 그는 “다른 팀의 눈치를 보거나 시장의 흐름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롯데를 떠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도 않았고, FA 협상이라는 게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또 “내가 돈을 1000만원이든 1억원이든 더 받고자 했다면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협상 전략을 더 치밀하게 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가장 난항을 겪은 부분은 계약 기간이었다. 손민한은 롯데에서의 4년을 보장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구단은 다년 계약이 금지된 FA 관련 규약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손민한은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내년에 좋은 성적을 낸다면 앞으로 더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나”라면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후회는 남게 마련이다. 롯데에 남기로 결정했다면 좋은 모습으로 남길 바랐다”며 웃었다.
○체력·구위 저하? “나는 문제 없어”
올해 26경기에 선발로 나선 손민한의 성적은 12승4패에 방어율 2.97. 다승(18승)과 방어율(2.46) 1위를 차지했던 2005년 이후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다. 무엇보다 그는 올해 총 179이닝을 소화해 LG 봉중근(186.1이닝)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던졌다. 팀의 에이스로서 손색없는 성적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나이와 체력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서운한 듯 했다. 그는 “나는 빠른 공으로 타자를 제압하는 투수가 아니다. (컨트롤과 경기 운영능력으로 승부하는) 내 스타일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또 “FA 계약에 앞서 여기저기서 ‘구위가 떨어진데다 이제 내리막길’이라는 얘기가 나와 개인적으로 많이 속상했다”면서 “어떤 부분 때문에 평가절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발이 퀄러티스타트(6이닝 3자책점 이하)를 자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주장. 손민한은 또 “내가 감독이라면 선발 투수에게 딱 세 가지 조건만 보겠다. 팀이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고, 긴 이닝을 던질 수 있고, 기복이 없는 투수. 이런 게 좋은 선발투수 아닌가”라고 했다.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손민한을 칭찬할 때마다 언급했던 장점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평생의 소원은 ‘롯데의 우승’
손민한에게는 이제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일만 남았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꼭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다. 올해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3연패로 힘없이 탈락한 아쉬움이 아직도 씻기지 않은 듯 했다.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가을야구’였는데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끝나버려서 정말 허무했다.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해 그만큼 실망도 컸다”면서 “오히려 내년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올해 실패한 경험이 자양분이 됐으리라 믿는다. 내년에는 우리 팀도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이라고 자신했다.
개인적인 목표도 전혀 없다고 했다. “아무도 못 믿더라도 이건 정말 내 솔직한 심정”이라면서 “오로지 팀 우승이 전부”라고 강조했다. “개인 성적에는 큰 미련이 없다. 내가 다승왕이나 방어율왕을 안 해봤다면 개인 타이틀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나. 다만 팀의 우승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는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보내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 반갑게 달려와 어깨동무를 했다. 후배 박기혁(28)이었다. “와. 나 형하고 다시 같이 뛸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아요!” 그러고보니 손민한은 계약 발표 직후 전화를 건 강민호(23)에게 “너 내년에도 내 룸메이트다. 알겠나”라고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손민한은 “어제 정말 전화를 많이 받았다. 내가 후배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좋은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직 | 배영은 기자 y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