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재활‘구슬땀’SK이호준
천부적이랄까. SK 이호준(33)은 어떤 화제가 나오면 거기서 스토리를 끌어내는 재주가 있다. 가령 2000년 해태에서 SK로의 트레이드 심경이 어땠는지 물으면 “제가 2군에 있을 땐데, 해태 차영화 코치가 부르더니 ‘너 선경그룹으로 가게 됐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실업야구로 트레이드 된 줄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야구를 못해도 그렇지.”‘야구선수가 야구만 잘 하면’은 지금 세상에 흠결이다. 자기만의 개성(이미지)과 스토리라인을 창출해야 스타다. 대중이 류현진보다 김광현에 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호준은 본능에 가까운 이런 감각을 살려서 상품성을 특화한 성공 사례다.
무릎 통증으로 재활에 한창인 와중에도 달변은 여전했다. 엔트리 제외로 마음이 심란할까봐 서먹해서 “벌써 10홈런으로 재기했고, 200홈런도 눈앞이니 결산 한번 하자”고 하니, “홈런 10개 중 6개가 솔로여”라고 웃겼다.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호감을 준다. 따지자면 그의 야구인생은 거듭된 역경의 극복 과정이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여정에서 낙관을 잃지 않는 점, 그것이 이호준의 특별한 경쟁력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야구할 팔자였던 모양이다. 야구부가 없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특활 시간에 우연히 야구를 했다. 체육 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 “야구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권유했다. 안 믿을지 모르지만 당시 공부도 제법 했다. 그러나 야구를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폼 나서.”
육상선수 출신인 어머니도 원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승낙했지만 막상 운동을 하자 평생의 후원자가 됐다. 투수로서 중학교부터 싹수가 있었던지 명문 광주일고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졸업 후 연세대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죽어도 못 가겠다”고 우겨서 해태에 입단했다. 자유분방한 그의 성향이 엄격한 위계질서를 요구하는 학교 체육과는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아버지 덕분에 입단 당시 하나의 자랑이 생겼다. ‘해태의 전설’ 이종범보다 계약금을 더 많이 받은 것이다. 아버지가 정말로 아들을 연세대에 보내려 하자 안달 난 해태가 발표된 계약금과 달리 이면 계약까지 추가해 붙잡은 덕분이었다.
이호준은 타자를 희망했지만 해태는 투수를 원했다. 1994년 8경기 12.1이닝 10.20의 방어율(찾기 힘든 희귀 기록이다)을 남겼다. 투수가 하기 싫었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광주 빠삐용’ 이호준의 전설(임창용과 함께였다)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군 연습장이 아니라 광주 나이트클럽에 가야 볼 수 있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아버지가 잠복해서 잡아간 적도 있었다.
이때 그를 잡아준 은인이 김일권 당시 2군 코치였다. “맞아 죽을까봐 무서워서 야구를 했다”고 술회할 정도로 다그쳤다. 뒤에선 이호준의 타자전향이 이뤄지도록 도왔다. 해태 2군의 김성근 감독도 이 시절 처음 만났다.
의욕을 되찾은 뒤 타자로서 궤도진입은 김성한 타격 코치를 만나서 이뤄졌다. 오키나와 캠프에 장성호 등과 갔는데 거기서 타법이 잡혔다. 그때의 훈련은 지금 SK 훈련보다도 강도가 높았다.
이후 타격 부문 10걸에 드는 등, 싹을 틔웠다. 그러나 과거의 낙인 탓인지 김응룡 감독 눈엔 마뜩치 않은 듯했다. 현기증으로 쓰러져도, 훈련 중 다쳐도 다 술 마시고 사고 친 것으로만 오해받았다. 다시 2군. 절망했을 때 SK행이 성사됐다. 오히려 기뻤다. 팀 궁합도 맞았다. 주전을 꿰찼고, 타점왕도 됐고, 아내를 얻었고, 우승도 해봤고, FA도 누렸다.
돌이켜보면 부인 홍연실 씨와의 만남이 전환점이었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건만 ‘결혼은 무조건 초등학교 선생님과’란 어릴 적부터 환상이 있었다. 지인을 통해 선생님과의 만남이 주선됐고, “얼굴도 안 보고 무조건 결혼”이란 마음으로 나갔다. 그런데 상대가 돌연 아파서 나오지 못했다. 대신 이호준은 주선자와 동석한 후배 스튜어디스 교육생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이 홍 씨였다. 서로 말이 통했고, 비슷한 점이 많은데 호감을 느꼈다. 만남은 이어졌고, 열애 1년여 만에 결혼에 합의했다.
그러나 장인의 반대가 극심했다. 집에 찾아가 문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지만 외면했다. 장인의 마음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기적과 같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이호준 부모님처럼 장인은 경찰공무원이었고, 장모는 육상선수 출신이었다. 특히 장모가 열렬한 야구팬이어서 사위를 측면 지원했다.
와이프의 여자친구들 모임에 갔는데 연봉과 차종을 질문 받았다. “연봉 1억, 차는 BMW”라고 했다. 실제론 연봉 4000만원, 차는 없었다. 그러나 다 알면서도 홍 씨는 덮어줬다. 그래선지 지금도 애처가 기질이 다분하다. “애가 셋인데 집사람은 하나 더 낳으려 한다”고 했다. 금슬을 짐작할 수 있다.
이호준의 아버지는 “나도 네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단다. 2007년 우승 직후 4년 총액 34억원에 SK 잔류를 택했다. ‘특정 선수에게 30억 이상은 쓰지 않는’ SK의 불문율이 깨졌다. 당시 SK는 이호준보다 아버지와 와이프를 ‘집중공략’해 잔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지난해 무릎이 아팠다. 독일 쾰른까지 가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괴롭다. 괜히 수술했다 싶은 후회도 든다. 비록 그 없이 우승했지만 후배들에게 ‘먹튀 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면목도 없다. 올 시즌은 50%%의 몸으로 뛰었다. 무릎을 굽힐 수 없는 지경의 악전고투로 수비와 주루는 물론 타격까지 지장을 받았다. 결국 2군행을 자청했다. SK는 이병국 트레이너를 전담시켜서 재활을 돕고 있다. 만신창이 몸으로 10홈런을 쳐냈다. 200홈런에 4개차로 접근했다. 100홈런에서 150홈런까지 1년 걸렸는데 200홈런엔 5년이 걸리는 셈.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타고 났다”는 그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고마운 사람은 김성근 감독. 김 감독을 만나 “야구를 길게 하려는 마음”을 배웠다. 늘 감사하는 ‘덕분에’ 마인드. 도전에 응전할 수 있었던 이호준의 엔진이다.
문학 |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